GEROGERIGEGEGE by OUII

http://id3419.securedata.net/artnotart/gero/information.html

*********************************************************************************************

https://youtu.be/kYaRV6EwI3U

1992 J. YAMANOUCHI INTERVIEW
주석: RRR의 [RRReport]지에 실린 인터뷰이다.

The Gerogerigegege의 리더, Juntaro Yamanouchi의 답변들
[주석 - 원본 잡지에 질문은 인쇄되지 않았다]

나는 The Gerogerigegege라는 이름의 록 밴드를 운영하고 있으며 노이즈 음악을 공연한다. 공연에서 스스로 벗는 남자는 Gero 30으로 51살이다. 그는 밴드의 결성 때부터 멤버였으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벗은 몸을 보여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경찰이 두렵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 또한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원할 때라면 언제든 무대 위에서 섹스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행위에 딱히 관심은 없다. 우리는 그것보다 더 흥분되면서 스릴있는 경험을 원한다. 자위행위처럼.

도쿄 신주쿠 지역에는 1960년대부터 게이들에게 유명해진 한 거리가 있다. 그 곳에는 게이바가 이 지역보다 더 많다. The Gerogerigegege는 어떤 멤버십 전용 SM 클럽에서 진행했던 공연을 위해 만들어진 밴드였다. 우리는 동성간의 사랑을 위해 공연을 하지만, 어떤 사회 활동과도 연계될 생각은 없다.

우리에게는 일본의 게이 협회인 O.C.C.U.R.(음악 밴드는 아니다)가 있다. 하지만 일본의 게이들은 미국의 게이들처럼 퍼레이드를 하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아마도 The Gerogerigegege 공연에서 더 진보적인 태도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게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솔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게이들이 자신이 게이인 것을 숨기고 이성애자들과 어울리지 않으려 노력한다면, 게이들은 자연스럽게 차별을 받게 되고 우울해지게 된다. 나는 언제나 여성복을 입고 다니지만 그 누구도 내가 게이인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게이인 것에 대해 항상 열려 있었으며 특별한 문제 없이 여성으로써 살아왔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는 내 친구들 중 아무도 AIDS로 죽지 않았다. 게다가, AIDS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미 유행이 지난 일이다.

몇몇 저널리스트들이 내가 좌파 사상에 영향을 받은 음악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음악을 만들려고 한 적이 없으며, 음악에 사상을 담으려 한 적도 없었다.

아무 문제 없었다. 우리는 모두 Ramones를 정말 좋아한다. [Tokyo Anal Dynamite] 앨범을 들어 보면 알 거다.

나는 우리가 일본 노이즈/인더스트리얼 음악계에서 가장 높은 음반 판매량과 인지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The Gerogerigegege가 다양한 종류의 음악을 공연하며 여러 음악 잡지와 TV에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작곡가로서도 활동하며 음반사에서 로열티도 받는다. 작년 한 해 (1990년) 우리는 [Tokyo Anal Dynamite]를 3,000장 판매했으며 그 이후로도 일본에서만 2,800장을 더 팔고 있다. 일본 말고 우리 음악을 파는 곳은 RRR 및 Holland 레이블이다. 우리의 첫 두 LP [Senzuri Champion](1987)과 [Showa](1989)는 중고 음반 판매점에서 장당 20,000엔 ($142) 의 가격을 기록한 적이 있다. 그리고 내가 듣기로는 그 가격에 벌써 팔렸다고 한다.

우리는 밴드를 1985년에 결성했다. SM 클럽을 벗어나 밖에서 한 첫 공연은 1986년 10월이었다. 이 공연은 와세다 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한 일들 중 하나였다. 우리는 와세다 대학교 공연장에서 공연을 했고, 당시 멤버는 나, Gero 30, Grim(전 White Hospital)멤버 두 명, 그리고 C.P.의 Mr. Elle였다. The Gerogerigegege의 공식 멤버는 나와 Gero 30이지만, 지금까지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주었으며 공연을 할 수 있게도 해 주었다. 최근 우리는 한 달에 두 번 꼴로 클럽(SM 클럽이 아니다)에서 공연한다.

답변하지 않겠다.

1988년 6월, 우리는 몇몇 음악 잡지에 우리의 첫 플렉시디스크 음반 발매를 기념하여 에노시마 해변에서 공연을 하겠다는 공고를 냈다. 그리고 우리는 2,000장의 플렉시디스크 음반을 관객들 앞에서 한 곳에 쌓아 두고 가솔린을 붓고 불을 질러 전부 태워버렸다. 이 광경을 찍은 사진이 몇몇 음악 잡지의 커버 사진으로 쓰였다.

첫 LP [Senzuri Champion]을 직접 제작했기에, 우리는 작년(1990년)부터 CD 대여 업계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모든 것이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Vis 'a' Vis Audio Arts 레이블은 일본 법으로부터 인정받은 합법적인 법인이다. The Gerogerigegege는 레이블 판매 수익의 90%를 가져간다. 다르게 말하자면, 나는 Gero 30이 무대 위에서 자위행위를 하게 해 줌으로써 돈을 벌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

https://youtu.be/1-AYygKRoQI

1995 J. YAMANOUCHI INTERVIEW
주석: [Savannatarashi]지의 Billy Nocera가 진행한 Juntaro의 인터뷰이다.

Hello Juntaro! The Gerogerigegege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짧게나마 밴드의 역사에 대해 말해 달라.

- 나는 1995년 초반 (편집주 - ???) 부터 노이즈를 만들어 오기 시작했다. 내 첫 레코딩은 카세트 테이프로 발매되었다 (제목 없이). 곧 여러 사람들과 레코드 가게가 내 음악을 좋아해 주었다. 도쿄에서 대략 105개 정도를 팔았던 것 같다. 그 후 나는 첫 앨범 [Senzuri Champion]을 만들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많은 CD를 발매한 것으로 안다! 일본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을 게 분명한데, 당신은 일본의 익스트림 노이즈 뮤지션들, 예를 들자면 MerzbowMasonna같은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편인가???

- 몇몇 사람들/밴드들은 우리를 좋아하고, 몇몇 사람들/밴드들은 우리를 싫어한다. 나는 다른 밴드나 다른 음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일본에서 라이브 공연을 하는가? 공연을 할 때 반응은 어떤가?

- 공식 밴드 멤버는 나와 Gero 30(현재 57살인 노출광)이다. Gero 30은 무대 위에서 자위행위를 한다. 우리의 첫 공연은 1986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우리는 그 이후로 대략 50번의 공연을 했다. 대다수의 관객들은 웃거나 소리지르거나 한다. 라이브 앨범 [Live Greatest Hits]에서 들어볼 수 있다!

밴드 이름의 뜻은 무엇인가? 다른 음악도 많이 듣는 편인가? GG Allin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 The geekexhibitionistramrodonanismgayenobrammeritchgigenmagro-inejaculationgenderfuckerotica. (편집주 - 알았다!) 듣는 음악으로는 특별히 스웨덴 일렉트로-어쿠스틱, Leig Elggren, Suns of God, CM von Hausswolf 같은 음악들을 많이 듣는다. GG Allin에 대해서 말하자면, 나는 그의 음반과 비디오 대부분을 갖고 있다. 특별히 [Dirty Love Songs] 더블 앨범을 좋아한다. (편집주 - 그렇지!)

현재 노이즈 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떤 밴드를 좋아하는지?

- 핀란드의 Bizarre Uproar. 그의 음반은 전부 끝내준다!! 그리고 Aunt Mary(그의 옛 밴드다)도 좋아한다.

당신의 레이블에서 어떤 앨범들을 발매 해 왔는가? The Gerogerigegege의 새 앨범에 대한 소식은?

- The Gerogerigegege: [Senzuri Champion] LP, [Showa] LP, [Tokyo Anal Dynamite] CD, [Senzuri Power Up] CD, [Live Greatest Hits] CD.
Ramleh(UK 하드코어 기타 록): [Grudge For Life] LP.
Mauthausen Orchestra(이탈리아 노이즈): [Five Years of Slaughters]
Sbothi(독일 노이즈): [Can the Sound Change]
The Gerogerigegege가 발매할 예정인 앨범들은...
[Wreck of Rock n Roll Former Self] 7'' EP (19곡, AIPR 레이블)
Man is the Bastard와 같이 제작할 스플릿 EP
Psycho와 같이 제작할 스플릿 EP
[Ultimate Psycho Trash] CD (Play Loud 레이블)
[Life Documents] 7'' EP (Fourth Dimension 레이블)

인간 존재의 몰락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 많은 밴드들이 시체나 잔혹한 이미지를 담은 사진을 앨범 커버로 사용한다. 나는 그런 싸구려에 멍청한 상상을 싫어한다.

당신의 밴드와 레이블의 목표는?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할 생각을 해 본 적은?

- 메이저 레이블에는 관심이 없다. 록 밴드에도 관심이 정말 없다, 록 앤 롤! The Gerogerigegege는 록 밴드가 되고 싶지 않다!

오케이, 내 멍청한 질문들에 답해줘서 고맙다! 독자를 위해 마지막 말 한마디 해 줄 수 있을지?

- 나는 록앤롤을 사랑한다!!!

*********************************************************************************************

https://youtu.be/qeASLxjAtCo

J. YAMANOUCHI INTERVIEW

주석: 이 인터뷰는 원래 프랑스 잡지 [Life Without Sex]에 실렸었다.

태초에... 우주가 있었다. 어느 날... 행성이 생겼다. 바다에서... 땅이 나타났다. 그리고... 도시가 생겼다! 그리고 도시에서는? The Gero... 뭐라고?!!!

* 들어가기에 앞서 말하고 싶은 부분은, 이 기사에서 "Gero 56"은 "Gero 30"을 가리키는 의미였다는 것이다. 그 남자의 이름은 처음에 Gero 30이었고 지금은 또 다시 Gero 30으로 돌아왔다 [J.Y.].

1) The Gerogerigegege 전에도 음악이나 노이즈를 만들었었는가?

나는 The Gerogerigegege의 첫 테이프 발매 전까지는 그 어떤 음악도 발매하지 않았었다. 1985년의 그 때, 나는 노이즈 음악과 "1,2,3,4"로 시작하는 The Ramones의 라이브 앨범들만 듣고 있었다. 그래서 The Gerogerigegege가 "1,2,3,4" 스타일의 노이즈 음악을 하게 된 것이다. 1985년 초반 나는 그런 스타일의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내 음악에 어떤 이름도 없었다. 이 당시의 음악들 중 하나는 1993년 일본 레이블을 통해 발매한 [北の丸百景 (Kitanomaru Hyakkei)] 7'' EP에 수록되었다. 그러다가, 1986년, 나는 Seven Minutes of Nausea의 두 번째 테이프를 듣게 되었는데, 내 음악과 똑같다고 느꼈다.

2) 1985년의 The Gerogerigegege에게 영향을 (음악적으로나 노이즈적으로나) 준 것은 무엇이 있는가?

--- NP([NP Session Tape], 내 친구인데, 당시 한정판으로 팔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테이프는 CD로 발매되어야 할 것이다.)
--- The Ramones의 라이브 앨범들
--- ZSF 레이블 음반들

3)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밴드 멤버들이 도쿄 신주쿠 부근의 SM 클럽에서 만났다고 하는데... 그리고, "정도를 벗어난" 성적인 퍼포먼스들에 대해 당신이 가지고 있는 관심을 생각하면... SM, 본디지, 일본 특유의 "문화"와 The Gerogerigegege 음악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도 나는 남녀 사이의 SM 플레이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다. 당시 나는 신주쿠의 한 게이 클럽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 곳에서 Gero 30과 SM 쇼를 하고 지냈다. 사실 나는 일본 SM에 대해 지식이 없는 편이라서 할 말이 별로 없다. 아무튼 그 쇼에서 나는 배경음악 없이 모든 일을 했는데, 아마 그런 점 때문에 관객들이 더 흥분했던 것 같다. 쇼의 내용은 별 게 아니라 나와 Gero 30이 서로의 똥을 먹고 서로의 오줌과 똥 속에서 섞이는 것이었다. 무대 위에서 그런 공연을 하고 있을 때, 대부분 중년인 관객들은 관객석에서 자위행위를 한다. 뭐 어쨌든, 그 어둠 속에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라고는 자위행위를 하고 있는 중년 남성의 헐떡이는 목소리와 흥분한 콧소리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설명들보다도, 이 경험이야말로 The Gerogerigegege의 음악과 공연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4) The Gerogerigegege는 1985년에 당신과 Gero 56(노출광!)이 함께 시작했다고 알고 있다. 그러다 밴드 멤버가 많이 늘어났었던 것 같고, 지금은 혼자서 작업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다면, 지금은 The Gerogerigegege의 정식 멤버는 당신 뿐인가?

지금도 공식 멤버는 두 명이다: Gero 30과 나. 하지만 음악에 관련된 일은 내가 전부 한다.
공연에서는 연주를 하는 사람이 정말 많으며 정확한 숫자는 잘 모르겠다. 1985년 밴드를 시작할 땐 Gero 30 말고도 2명인가 3명인가의 다른 노출광들이 참여했었다. 그들과 나는 지금은 친하게 지내는 사이인데, 그들은 공연이나 음반에 전혀 참여를 안 했다. 아니, 단 한 명은 [Live Greatest Hits]에 참여했었던 것 같다. 다른 노출광들은 해변가에서 게이 섹스를 하고 각자의 항문에 12개의 양초를 꽂은 채로 즐기는 모습을 촬영한 비디오를 내게 보내 주었었다. 그들은 또 예술대학에서 누드 모델로 활동하며 자신들만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길 성기가 너무 단단해져서 끝에서 액체 방울이 떨어질 정도였다고 했다. 나는 이 비디오들을 편집해서 나중에 발매할 예정이다.

5) 다른 멤버들은 지금 뭘 하고 있는가 (어디서 듣기로는 한 멤버는 'Scum-Rock' 밴드 Mamarracho에서 활동을 했다고 하던데...)? Gero 56은 지금 뭘 하고 있는가?

Gero 30은 병원 신세를 진 지 꽤 오래 되었다. 가끔 나에게 전화를 해서 다시 한 번 무대 위에 올라 매일같이 자위하는 생활을 하고 싶다고 말하곤 한다.
아직도 음악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은 몇 없다. Mamarracho는 두 명이 결성한 밴드인데 이들은 The Gerogerigegege에서 활동한 적이 있는 사람들이다.

6) 1998년 당신은 아주 희귀한 (2000장 한정) 플렉시디스크 음반, 일명 [Ai-Jin]을 제작하고는 전부 불태웠었다... [Kitanomaru Hyakkei] 7'' EP 부클렛에는 "그 음반에는 Teresa Teng [편집주-그런데 이 사람이 대체 누군가?] 커버 곡이 들이었었다. 에노시마 해변에서 진행하는 프로모션 행사를 직접 보러 온 수많은 팬들 앞에서, 2000장 모두가 불에 태워졌으며, 일부만이 타지 못한 채로 남았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런 일을 한 것 뒤에는 어떤 아이디어가 있었는지 설명해 줄 수 있는가?

2000장의 플렉시디스크는 제작할 때부터 사람들 앞에서 불태워 질 예정이었다. 그래서 여러 음악 잡지에 "발매 추모 공연"이라고 광고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날 많은 사람들이 왔었다. 물론 그들은 공연을 기대하고 온 것이었지만, 실제로 본 것은 대신 디스크들이 쌓여서 불에 타고 있는 모습이었다. 남은 플렉시디스크는 순전히 다 타지 않고 잊혀진 채로 남은 것들이었다... 음, "어째서?"라는 질문에는 답을 못 하겠다. 대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짓이야말로 The Gerogerigegege라는 것이다! 내가 플렉시디스크들을 불태울 동안, Gero 30은 자위를 하며 즐기고 있었다.
(Teresa Teng은 대만 가수로 한때 일본에서 대박을 친 적이 있다.)

7) 당신의 음반들 중 일부는 두 명의 남성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담고 있고, 일부는 자위행위를 하는 소리가 일종의 강박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으며, 실제로 1989년 도쿄 게이 센터에서 The Gerogerigegege 공연이 진행된 적도 있다 (Vis 'a' Vis 레이블에서 [Live at The Tokyo Gay Center] 7'' EP로 핑크색 10장 한정 발매된 공연이다). 이를 참고한다면, "Gerogerigegege"를 "Gerogeri-gay-gay-gay"라고 생각하는게 더 적합한 것일까?

"GEROGERIGEGEGE"라는 이름은 일본어로 "게이"라는 단어와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구토하는 행위(GERO)와 설사(GERI)를 일본어로 표현한 것에 GEGEGE를 붙인 것이다. 나는 이 이름을 선택하면서 일종의 자유로움을 느꼈다. 하지만 "Gero-geri-gay-gay-gay"라고 발음하는 것도 아주 좋다고 생각한다. 멋지다!!!

8) The Gerogerigegege는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는 밴드로 보인다. [All You Need is Audio Shock](1995) 7''의 harsh noise, [Night](1993) 7''의 컨셉트 앨범, [Instruments Disorder (170 Songs)](1994) CD의 scum rock / noise, 그리고 [None Friendly](1999) CD의 ambient 까지...
대단하면서도 이상하고 평범하지 않은 작품 목록이고, 아주 자유로워 보인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The Gerogerigegege의 작품세계를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The Gerogerigegege만의 철학이 있는가?

개인적으로는 노이즈 또한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장르나 장르들 간의 경계라는 것이 없다고, 소음 또한 음악이라고 생각하며 음악을 만들었다. 이렇게 음악을 대하는 방식 때문에 내 음악을 "다양한 장르"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가끔은 사람들이 내 음악을 팬들의 기대에 대해 정반대의 방향으로 향하는 음악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딱히 의도된 것은 아니다 (몇몇 공연에서는 의도되었기는 하다). 음악을 항상 특정 의도를 갖고 만든다면 하나도 즐겁지 않을 것이다. 뭐 어쨌든,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음악을 만들었다는 것이며,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라는 것이다. The Gerogerigegege의 두 가지 메인 테마는 다음과 같다: "남들을 따라하지 않을 것"과 "인간의 감정"이다. The Gerogerigegege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9) Vis 'a' Vis 레이블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된 것인가? 누가 운영하는가?
Vis 'a' Vis 레이블이 플렉시디스크 앨범 (특별히 The Haters의 [Fushait] 30장 한정 발매를 좋아한다...), 그리고 LP, 이제는 CD를 발매하고 있는 것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Vis 'a' Vis"라는 이름은 첫 LP를 만들기 전에 이미 생각하고 있었던 이름이다. 이 레이블은 내가 내 음반들을 발매하기 위해 만들었다. 프랑스어라는 것과 단어의 뜻 [= 반대, 반목] 둘 다 좋아한다. Vis 'a' Vis는 나 혼자 운영하는 레이블이다.

10) 공연을 자주 하는 편인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무법천지의 공연인가 (다 벗은 남자들이 나오는 그런...)?

Gero 30이 이제는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기 때문에, 나 혼자서 공연한다. 내 단독 공연에 대해 좋은 의견들을 듣는 것은 좋은 일이다.

11) The Gerogerigegege의 작품들이 대체로 매우 혼란스러운 것을 생각했을 때, The Gerogerigegege에게 미래에 대한 계획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당신의 발전은 무엇인가?

8번 질문에서 대답했듯이, 가장 중요한 것은 The Gerogerigegege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언제나. "발전"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것 만을 한다.

12) [None Friendly] CD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있는가 (이 앨범이 특별한 앨범인지)?

[None Friendly]에 대해 말하자면, 물론, 내가 만들고 싶어서 만든 앨범이다. 완성하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곡을 처음 만들었을 때, 나에게 있어서 큰 의미가 생겼다. 뭔가 이야기를 말하자면, 몇몇 일본 음악 잡지에서 말했듯이, [None Friendly]는 그냥 타이틀이다.

2001
[English translation : MANO GEN]

*********************************************************************************************


Burning Question by OUII

*********************************************************************************************
https://www.theguardian.com/theobserver/2000/feb/13/life1.lifemagazine4

https://youtu.be/bWebqCRw7o4

Burning Question

어째서 Bill Drummond는 £1,000,000를 불태웠던 것인가? 어째서 자신의 손을 무대 위에서 잘라내고 싶어했었는가? 어째서, 차트 1위를 하던 KLF를 해체시켰는가? 논란의 중심이었던, 예술가로 전향한 팝 스타가 중년이 되어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기는 할까?
/Andrew Smith

이 사건을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예술? 이상한 정치적 행보? 통제를 벗어나 끔찍할 정도로 날뛴 해프닝? 무엇이었든지, 이 사건은 20세기의 마지막 20년간 개인이 저지른 일들 중 가장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거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었다 - 대다수는 이 사건이 정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누군가가 그 정도로 멍청한/무책임한/자유로운 일을 행할 수는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었다. 그들은 정말로 그 일을 했다. Bill Drummond를 짜증나게 만들고 싶다면, 한번 그를 '사기꾼'이라고 불러 보라.

"진짜라고 생각했었지." KLF와 관련되었던 사람이자 오랜 시간 Bill Drummond와 친분을 유지한 한 제보자가 내게 말했다. "왜냐하면, 그 일이 있고 나서, Jimmy와 Bill은 걱정과 혼란으로 가득 차서 완전히 맛이 간 사람처럼 보였거든.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둘은 그 이후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어."

1994년 8월 23일, Drummond와 Jimmy Cauty는 Jura 섬으로 떠나, 이 일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관객 1명을 비밀스럽게 초대하여, 그 앞에서 자신들의 돈 £1,000,000의 지폐를 불태워 버렸다. 이 둘은 당시 30대 후반이었으며, 이 돈은 UK 역사상 가장 뜬금없이 성공한 팝 그룹 중 하나로써 활동한 결과였었다. 1991년 KLF(Kopyright Liberation Front)는 세계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번 UK 음악가였다. 클럽에서 발흥한 포스트 애시드 하우스 붐을 제대로 올라탄 이들은 결코 망할 수 없는 밴드였고, 이들이 만든 곡은 전부 대박을 쳤다. 하지만 다음해가 되었을 때, 이들은 Brit Awards 시상식 개막공연을 헤비 메탈 세션 밴드와 함께 혹독한 퍼포먼스로 후려쳤다. 공연이 끝날 때, 당황한 관객들은 혼란스러운 와중 "KLF는 음악 산업을 떠날 것이다"라는 성명을 듣게 되었다. 막 도축된 양의 시체가 시상식 애프터파티 장소 문 앞에 놓여 있었고, 시체에는 이런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I died for ewe - Bon appetit." 이들은 누구나 탐내는 화려한 밴드로 나타났으며 그 후 곧바로 스스로 해체해 사라졌다. 그리고, 1994년, 그들은 자신들이 그 동안 번 돈 거의 전부를 불에 태워버렸다. 어째서?

Drummond는 내 앞에 앉아 있었다. 억세보이지만 동시에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기도 한 47살의 이 남자는 북부 London의 싸구려 식당에서 치즈 오믈렛과 감자튀김을 오후 2시 30분에 오늘 처음으로 하는 식사로서 먹고 있었으며, 오늘의 인터뷰는 지난 6년 동안 그가 처음으로 하는 인터뷰였다. 그와 Cauty는 백만 파운드에 관해 외부에 언급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었고, 그는 이 약속에 대해 나에게 설명하려 했다. 우리는 교묘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나는 그에게 당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당시의 우리에게 백만 파운드가 큰 돈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알아내려고 하는 것인지?" 그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돈을 태운다는 것 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또한 누군가의 영혼을 정화한다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의 맥락에서는 백만 파운드가 2백만 파운드보다 더 많은 것이다. 백만 파운드라는 것은 일종의 상징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희망하는 것이었다. 백만 파운드에는 힘이 있는 것이다."

한번이라도 후회했던 적이 있는가?

"...아니다..."

현재 경제적으로 안정된 상황인가?

"아니,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러면 어째서 그런 일을 한 것인지, 나는 물어보았고, 지폐가 펄럭거리고 움직이다가 마침내 돌이킬 수 없이 하늘로 가버리는 것을 볼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대답이 나오기까지는 대략 2시간의 시간이 걸렸고, 그렇게 들은 대답 또한 내가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지난 몇 년간 Drummond는 상당히 조용하게 지냈으며, 아내 Sallie Fellowes와 두 명의 (곧 세 명이 될) 아이들과 함께 Aylesbury의 농장에서 살았다. 그의 경력에 얽혀 있는 복잡한 논리는 그의 사생활에도 반영되었는데, 그에게는 두 명의 다른 전 부인과 세 명의 다른 자녀가 있었다. 그는 앞의 두 명의 자녀와는 서로 잘 알고 지냈지만, 마지막 셋째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 헤어질 무렵 아직 18개월밖에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을 그는 "이상하다"라고 표현했으며 언급을 피하려고 했는데,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의 새로운 책 [45]에서, Drummond는 또 한번의 관계를 "버린"후 과연 자신이 "나중에 자식들 중 단 한 명이라도 같이 살게 될 수는 있을지"에 대해 궁금해졌다고 말했다. 그의 삶과 작품을 들여다 볼 수록, 창조와 파괴의 순환고리가 확고하게, 강박적으로 학창시절부터 계속되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하게 보여지리라.

그의 음악 경력 또한 이 순환에 완벽하게 들어맞으며, 이 점이 [45]를 팝 음악에 대한 좋은 책으로 만들어준다: UK에서 그 누구도 이 남자만큼 팝 음악을 돌아가게 하는 멍청하고 혼란스러운 긴장감을 제대로 탐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 창조와 파괴, 덧없음과 예측불허의 결과들, 신화와 잔혹한 진실. 그가 해 온 많은 일들이 단순한 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그는 "너무나도, 터무늬없을 정도로 진지했었다." 그는 자신이 해 온 일들이 무언가 의미를 갖기를 바랬지만, 팝 문화라는 것이 보통 자기가 하는 일이 뭔지 전혀 모르고 있을 때 가장 잘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기도 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항해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그가 탈출하고 싶었던 것을 이해하지만, 그는 탈출할 수 없었다.

[45]는 Drummond가 45살이 됨에 따라 떠올리는 기억과 순간들을 무작위적으로 배치했다고 하는 책이지만, 사실은 교묘한 - 그는 우연이라 말하겠지만 - 논리로 전개되는 내용이다. 책의 초반부에는 그가 12살 Kate와 10살 James 두 명의 자녀와 함께 음반 몇 개를 운반할 겸, 또 Michael Jackson 공연을 볼 겸 차를 타고 Helsinki로 향하는 도중의 일화가 담겨 있다. James는 이제 막 기타를 배우는 걸 관두기로 선언하고 아버지를 졸라 베이스로 갈아타려고 하고 있었다. 책에는 이 당시의 대화가 이어진다.

---

"그만 해, James. 악기 레슨에는 돈을 더 이상 안 쓸 거야. 베이스로 갈아타려는 이유는 단지 베이스가 더 쉬워 보여서잖아." 내 목소리가 높아졌고, 점점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평소에는 아이들한테 정말로 안 하는 행동이었다. 1년 전만 했어도 James는 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시무룩해져서 입을 닫고 있었다. Kate는 아무런 말도 안 했다. 나는 라디오 채널을 돌렸다. Abba의 "Winner Takes It All"이 나왔다. 나는 점차 현실에서 빠져나와 팝 음악의 열반에 빠져들고 있었고, 가슴 아픈 고통이 굴복의 황홀경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내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방울을 눈치채지 못하기만을 바랬다.

"아빠, 이해 안 돼? 학교에서 하루 종일 열심히 공부하고 집에 돌아와서 자유시간을 전부 기타 연습에 쓴다면 재미없는 사람이 되는 거라구."

"뭐, 누워서 TV 보는 건 재밌는 사람이 되게 만들어 주는 거니?"

"그냥 다른 아빠들하고 똑같은 말을 하고 있잖아. 아빠가 원하는 걸 하게 하려는 거."

"아니야. 나는 사실 네가 밴드 같은 거 안 하기를 바래. 많은 사람들이 밴드에 들어가길 꿈꾸며 젊을 때 고생하다가 결국 불행하고 우울하고 불만족스러운 채로 끝나. 밴드에 들어가는 일 따위는 안 일어나니까."

"아빠는 밴드에 들어갔었잖아."

"그건 그냥 운이었어. 봐봐, 실제로 밴드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잘못된 방향으로 갈 뿐이야. Prodigy의 Keith가 일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마다 행복할 것 같니?"

"헛소리야 아빠. 내가 밴드에 들어가고 싶은 이유는 내가 밴드에서 활동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아빠랑은 아무 관련 없어. 그리고 아무튼, 나는 베이스 연주하기 싫어. 나는 보컬 하고 싶어."

"James, 보컬이란 놈들은 전부 재수없는 놈들이야. 반에서 가장 안 좋아하는 놈을 떠올려 봐 - 그런 놈들이 보컬이 되는 거야. 모두가 보컬을 싫어해."

"헛소리. 모두가 보컬을 가장 좋아해."

"내 말은 밴드 멤버들이 보컬을 싫어한다는 말이었어. 보컬이야말로 언제나 게으르고 입만 산 주제에 허세만 가득하지. Liam Gallagher처럼 그냥 어슬렁거리면서 아무 일도 안 하고 미련하게 있고 싶어?"

"Oasis는 세계 최고의 밴드야. The Beatles보다 더. Oasis 보컬이 되는 건 멋진 일이야."

나는 미끼를 물지 않았다. 침묵이 뒤따랐다.

나는 내가 이 대화를 나의 10살짜리 아들과 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아이가 벌써부터 이런다면, 15살이 되어서 침실에서 마약류 식물을 키운다거나 할 때가 되면 어느 정도까지 가겠는가?

---

Drummond가 15살이었을 때, 그는 East Midlands 지역 Corby시의 임대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출생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당시 아버지가 남아공에서 스코틀랜드 교회의 선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처음 배운 단어들이 Bantu 민족의 언어 Xhosa였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득세함에 따라, Drummond가 18개월이 되기도 전에 가족 전부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고, 그 후 Corby시의 임대주택에 머물게 되었다. Drummond는 학교를 견디지 못했고, 결국 (Drummond에 따르면) 공부시간에 몰래 [NME]를 읽다 걸린 후 식스폼 컬리지(sixth-form college)에 맞지 않는 학생이라는 결론이 나게 되었다. Drummond의 관심사에 음악과 '뭔가를 만드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상담사는 향후 직업으로 악기 제작자를 추천했고, 이를 위해서는 예술 업계의 자격증이 필요했다. Drummond의 예술을 향한 열정은 그의 안에 오랫동안 강하게 남아있었지만, 예술학교 생활은 자퇴와 함께 금세 끝나버렸다. "뭔가 잘 안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마무리지었다.

음악은 미래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주었고, Drummond는 첫 경력을 Liverpool 원히트 원더 밴드 Big in Japan (Lightning Seed의 Ian Broudie와 향후 Frankie Goes to Hollywood의 보컬이 될 Holly Johnson (베이스였다 - James에게는 말하지 마라) 이 멤버로 있는 밴드였다) 에서 시작하게 된다. 이 밴드가 해체한 후, Drummond는 Liverpool에서 잘 나가던 포스트펑크 밴드 The Teardrop ExplodesEcho and the Bunnymen의 매니저로서 음악 산업에 계속 발을 담그게 된다. 그는 Echo and the Bunnymen이 유명세의 정점을 찍기 직전 그들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이런 행동은 향후 Drummond의 인생에서 일종의 패턴이 된다), WEA Records의 A&R 팀에 들어가 신인들을 발굴해 계약하는 업무를 맡는다. 이 업무에서 한 일들 중 유일하게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었던 일은 Brilliant라는 그룹을 발견, 계약한 일이었는데, 이 그룹은 Killing Joke에서 베이스를 연주했었던 Youth와 기타리스트 Jimmy Cauty로 구성된 밴드였다. 3년 후, Drummond는 불명예스러운 일로 인해 WEA Records를 관두게 되지만, Cauty와의 관계는 이어나가게 된다. 이후 이들이 거둔 상업적 성공의 배경에는 "WEA 상무이사 Rob Dickens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고 Drummond는 말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증명했다. 그것도 엄청난 방식으로.

KLF는 Kopyright Liberation Front의 줄임말이다. 이들의 1987년 첫 앨범인 [What the Fuck is Going On?]은 당시 막 사용되어지고 있었던 샘플링 기술을 활용, 다른 곡들의 여러 부분을 빌려와 새 곡을 만든 방식의 앨범이었다. 지금은 거의 일상적인 작곡 방식이 되었지만 - 그냥 Fatboy Slim 한 번 들어 보라 - 당시에는 논란의 중심에 선 방식이었고, 이들은 [Dancing Queen]의 한 부분을 무단으로 사용했다는 명목으로 Abba와의 소송에 휩쓸리게 되었으며, 결국 그 때 까지 팔리지 않은 재고를 전량 폐기해야 한다는 판결을 받게 된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예견하기라도 하는 듯이, Drummond와 Cauty는 Stockholm으로 날아가 Abba의 보컬 Agnetha Faltskog에게 자신들이 받았던 골드디스크 상패를 기념품으로 선물해 주려 했었다. 다시 한 번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예견하기라도 하는 듯이, 이 둘은 Agnetha를 만날 수 없었으며, 따라서 그냥 지나가던 길에 만난 한 창녀에게 기념품 상패를 선물로 주고는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1988년, KLF는 차트 1위 앨범을 만들기로 결정한다. 이들은 밴드 이름을 The Timelords로 바꾸고 [Doctor Who]시리즈 테마를 사용한 싸구려 댄스곡 [Doctorin' the Tardis]를 발매한다. 예상대로 이 곡은 UK 싱글 차트 1위를 달성했으며, 둘은 이 사건에 영감을 받아 [1위 곡을 쉽게 만드는 방법 (How To Have A Number One The Easy Way)]라는 일종의 가이드북을 출판하기까지 한다.

오스트리아 듀오 Edelweiss는 책의 지시를 충실히 따라 [Give Me Edelweiss]라는 곡으로 2백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히트를 친다. 1년 후, 다시 KLF로 돌아와 활동을 한 Drummond와 Cauty는 요동치는 레이브 찬가 [What Time is Love?]와 [3 A.M. Eternal] 두 곡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1990년 KLF는 최초의 "앰비언트 하우스" 앨범 [Chill Out]을 발매하고, 1991년에는 이들의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자 히트 싱글 모음집인 [The White Room]을 발매한다. 이 앨범에서 아마도 가장 이상하다고 할 수 있을 곡은 [Justified and Ancient]일 것이다. 이 곡에서는 컨트리 스타 Tammy Wynette가 보컬을 맡았으며, Freddie Mercury의 죽음과 이후 재발매 된 [Bohemian Rhapsody]를 제외하고는 그 해 크리스마스에 차트 1위를 독차지하고 있었던 곡이었다. 당시의 성공세는 이들이 스스로를 실패할 수가 없다고 여길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이들은 대단했으며, 원하는 것은 아무 것이나 마음대로 다 할 수 있었다. 1992년 Brit Awards 시상식장에서, 이들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Drummond는 청바지에 작업화를 신고 뒷면에 "K2 Plant Hire"라고 쓰여진 오렌지색 형광빛의 동키 재킷을 입고 있었다. 그는 부드럽지만 강하게 말하는 사람이었고, 감정이나 내면보다는 아이디어나 추상적인 주제에 대해 더 편하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두 번째 아내는 그가 갑자기 신을 영접하고는 교회로 떠나버릴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하곤 했었다. 아직까지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Drummond를 보는 누구라도, 그라면 그런 일을 충분히 할 법 하다고 생각하리라.

나는 1992년 Brit Awards 시상식장에서 무슨 일을 할 지에 대한 이들의 첫 계획이 '살아있는 양을 무대 위에서 실시간으로 도축하여 그 시체 조각들을 관객석으로 던져버리는 것'이었다고 알고 있다. 안타깝게도 KLF가 고용한 헤비 메탈 세션 밴드 Extreme Noise Terror는 채식주의자들이었기에 이런 종류의 퍼포먼스에는 참여할 수 없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이런. 또한, Drummond는 그는 당시 시상식장 무대 위에서 자신의 손을 잘라내 관객에게 던지는 퍼포먼스를 그 무엇보다도 가장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나는 무대 위에서 내 자신의 손을 직접 잘라서 관객에게 던지는 행위야말로 최후의 행위, 한계를 넘어서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Ulster 지방의 깃발을 보면 나오는 'Ulster의 붉은 손' 일화에 영감을 받았던 것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사람들이 배를 타고 처음으로 Ulster 지방에 도착했을 때, 배 안에 타고 있던 한 젊은 남자가 맨 처음으로 Ulster 땅을 밟은 사람이 되어 왕 또는 지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손을 잘라 배 위에서 해변으로 던졌다고 한다. 해서 나는 내 손을 잘라, 음악산업의 수없이 많은 인간들 위로 던짐으로써, 내 것임을 주장하고 싶었다."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맞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길거리를 걸어내려가며 스스로를 진심으로 부추길 지경까지 갔었다. 필요한 도구까지 구매했었다... 그리고... Jimmy가 나를 말렸다. 그런 일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설득했었다. 양의 시체가 필요한 상징이 될 거라고. 손의 역할도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놀라웠다. 내 눈은 Bill Drummond를 보고 있었지만, 내 귀는 Hannibal Lecter나 Spinal Tap의 David St. Hubbins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듯 했다. 어쩌면 내가 환청을 듣고 있는 것 일수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1992년 이후 실제로 일어났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면, Drummond가 진심이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KLF를 해체시킨 둘은 자신들의 백 카탈로그를 전부 말소함으로써 앞으로 발생할 모든 판매 수익과 로열티를, 말 그대로, 없애버렸다. The K Foundation으로 재탄생한 이들이 처음으로 한 일은, 1993년 최악의 예술가를 선정하여 상금을 수여하는 상을 기획, 진행하는 일이었다. 놀랍게도, 누구나 예측할 수 있듯이, 수상자 후보 목록은 1993년 Turner Prize 후보 목록과 정확히 일치했다. 조각가 Rachel Whiteread가 두 상을 모두 수상하였으며,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녀가 the K Foundation의 상금 £40,000를 거절한다면 이 상금은 불에 타 사라질 예정이었다. Turner Prize의 상금은 £20,000였다. 1993년 Rachel Whiteread는 꽤나 짭짤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곧, 판돈이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나는 두 가지를 명확하게 알고 싶었다. 첫 번째는 무엇이 Drummond와 Cauty로 하여금 1백만 파운드를 불태우게 한 것인지이며, 두 번째는 1백만 파운드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가이다. Drummond는 내게 그 당시 자신이 한 행동은 자신이 평소에 하던 행동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말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내가 볼 때 나는 언제나 같은 일을 해 왔다. 그냥 밖에서 봤을 때 달라 보이는 것 뿐이다." 그는 주장했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신빙성 있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 때는 내 내면에서 일어나는 똑같은 감정을 다루고 그 감정과 같이 뭔가를 해 나가는 것이었다."

무슨 감정을 말하는 것인가?

"뭔가 엄청난 것, 그래서 반드시 바깥으로 표출해야만 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포장지에 불과한 것이다. 지금 말이 되는 설명을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무엇인가?

"나도 잘 모른다."

내게는, 당신들이 KLF를 끝내버렸던 방식도 포함하여, 혐오의 감정을 공격적으로 표출하는 행위였던 것 같아 보인다. Manic Street Preachers의 Richie Edwards가 작은 칼을 가지고 자신의 팔에 '4 REAL'이라는 문구를 적었던 것이나, Nirvana의 Kurt Cobain이 자신의 머리를 총으로 날려버렸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45]를 읽으면서 내가 궁금했던 부분은, 당신이 팝 음악으로부터 받은 상처에 대한 복수를 노렸던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당신도 잘 알겠지만, 신화와 도상학(iconography)은 댓가와 함께 오는 것이니까. 또 나는 당신들이 돈을 자선단체에 기부하지 않고 불태워버린 것에 대해 몇몇 사람들이 분개하는 것을 보면서, 돈을 불태우는 행위가 인간과 돈 사이의 관계에 대해 꽤나 심오한 무엇인가를 짚어 주는 행위였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시간관계상 다음번에 이야기해야 할 듯 싶다.

"아니, 나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떤 부분에서는 통하기도 하지만. Jimmy와 나는 일정 기간동안 이 주제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결정했었다. 우리가 입을 놀릴 수록 돈을 불태웠던 것의 충격이 점점 더 사라져 갈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돈을 불태웠던 것을 파괴적인 행위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돈을 파괴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저 돈이 불타는 것을 보는 것이었을 뿐이다."

단 한번이라도 후회한 적이 있는가?

"뭐, 물론, 아이들 중 하나가 암에 걸려 죽어간다거나, California의 비싼 병원에서만 치료를 받을 수 있다거나 한다면 그렇겠지만... 아니라면, 후회하지 않는다."

UK 팝 음악의 대단한 점은 쓰레기와 대단한 물건이 같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끔은 같은 매개체 안에서 공존하기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이리라. [45]에서, 잊혀진 KLF노래 하나가 세르비아의 반 Milosevic 시위의 노래로 쓰여지게 된 일화를 소개하며, Drummond는 희미한 자부심의 흔적을 드러내었다.

---

보통 사람들은 라디오에서나 틀어질 자신의 수많은 3분 30초짜리 곡들 중 단 하나라도 단순한 팝 음악의 지위를 벗어나 [Give Peace a Chance], [Anarchy in the UK], [Three Lions] 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국가의 사회적인 구조에 들어가는 순간만을 기다리며 팝 음악의 인생을 보내게 된다. 오늘 아침, 나는 우리가 단 하루동안 녹음을 전부 끝마쳤던 노래 하나가, 싱글로 발매조차 되지 않았던 그 곡이, 쓰레기라고 생각해서 어딘가에 처박아두고는 완전히 잊어버렸던 한 곡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투쟁에서 중요하게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상한 일이다.

---

하지만 [45] 전부를 통틀어 가장 가슴이 저미는 순간은 'Now That's What I Call Disillusionment 1,2'라는 이름을 가진 마지막 두 장일 것이다. 이 마지막의 첫 장에서, Drummond는 단지 San Francisco 아방가르드의 전설 Residents의 드문 공연을 보기 위해 Echo and the Bunnymen의 기타리스트 Will Sergeant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서 집으로 돌아가 Birmingham Town Hall로 향했던 일화를 말하고 있다.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들이 공연에서 발견한 것은 그들이 상상해 왔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 다음 장에서 Drummond는 KLF의 스스로를 조롱하는 듯했던 마지막 공연, 1997년 Barbican에서 했었던, 두 명 모두 노인으로 분장해 전동 휠체어를 타고 나타났었던 그 공연에 대해 말한다. 이 공연은 당연하게도 언론의 멸시를 불러일으켰는데, KLF가 복귀한다는 것 자체의 모순, 그리고 그 공연의 어이없는 행태에 관련된 멸시였었다. 시작으로서는 좀 절망적이지만, Drummond는 공연의 리뷰 몇 개를 인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평안함과 수용으로 나아간다. 마침내, 그는 신화로써 살아가야 한다는, 믿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그리고 시대정신과 연결된 예술가로 활동해야 한다는 모든 의무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는 그저 펜을 집어들고는 남은 평생을 뭔가를 쓰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자유로움이 그 날 밤에 일어났었던 일들 중 최고의 것은 아니었다. 그 날 밤 일어났었던 최고의 것은, 그 동안 KLF의 가장 열렬한 팬 중 하나였었던, [Time Out]지의 한 저널리스트와 관련된 일이었다.

1988년, 당시 12살이었던 그 남자는 우리의 싱글 [Doctorin' the Tardis]를 구매했다. 그는 곧 우리에게 푹 빠져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가 행해 온 모든 일들을 전부 신실하게 따라오며 10대의 전부를 보냈다. 우리는 그가 가지지 못했던, 이상적인 아이돌 또는 큰 형과 같은 위치였다. 1992년 우리가 음악 산업에서 은퇴했을 때, 그는 우리의 위업에 대한 책까지 스스로 쓸 정도였었다. 그리고 1997년, 그 날의 밤이 왔다. 회색 콘크리트에 우리의 메시지를 되는 대로 대충 휘갈기고는 퇴근해서 다른 일을 하러 서두르고 있을 때였다. 나는 지난 시절 우리의 최고 팬이었던 사람의 손을 잡고 악수했으며 그의 무운을 빌었다. 바로 그 순간, 그와 나의 손이 악수를 하고 있을 때, 나는 그의 눈에서 무엇인가가 반짝이는 것을 알아챘다. 바로 환멸이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진정한, 그리고 순수한 환멸. 내가 Residents의 눈알 마스크 뒷편에 튀어나온 어두운 빛깔의 곱슬머리 가닥을 발견하고 말았을 때 느꼈던 감정만큼이나 강렬한 환멸이었다. Jimmy와 나의 짧은 팝 여정에서, 바로 이 때의 환멸의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그 동안 창조해 온 것들 중 최고의 피조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마지막 순간의 환멸이 없다면, 팝의 힘과 영광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일어난다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면 반드시 곧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 순간을 음미하라. 그 환멸은 곧 무관심으로 변해버리고, 삶이 계속됨에 따라 곧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일 터이니.

*********************************************************************************************


Money to Burn by OUII

*********************************************************************************************
https://ftp.xmission.com/pub/users/l/lazlo/music/klf/news-reviews/kfoundation-19940925-observer-burn.txt

https://youtu.be/h5YA0Uq2wXM

Money to Burn

The K Foundation은 예술을 빙자한 스캔들을 일으킨다. 그들은 대중음악상 시상식장 앞에 죽은 양의 시체를 늘어놓았었으며, 크롭 서클을 꾸며내었었고, Rachel Whiteread에게 £40,000를 주었었다. 이제 그들은 £1,000,000를 불태웠다고 주장한다… 아니면, 정말로? 한 저널리스트가 그들의 여정에 동참했으며, 이 글은 사건에 대한 그의 기록이다. 진위 여부는 스스로 판단하라.

Senecca 마크-3, 좌석 4개짜리 경비행기의 뒷좌석에는 올 한해 일어난 가장 괴상한 이야기의 결과물 일부가 놓여 있었다. 이 글을 읽어볼 그 누구도 이 이야기의 단어 하나도 믿기 어려워 할 것이기에, 괴상한 이야기이다. 이 글에 쓰여진 단어 하나, 마침표 하나 전부 진실이기에, 괴상한 이야기이다.

나를 제외한, 이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는 다른 3명의 승객은 이렇다: 한때 KLF라는 팝 그룹 멤버였고 이제는 the K Foundation(예술 재단이다) 의 멤버인 Jimmy Cauty와 Bill Drummond, 그리고 Falklands 전쟁에서 포병대로 근무했었으며 록 그룹 투어 매니저 일도 했었던, Gimpo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Alan Goodrick.

비행기 좌석 뒷 편에는 우리 넷의 짐이 있었다. 배낭들, 더플백들, 딱히 대단하다 할 만한 건 없었다. 거기에 2개의 Gabriel 여행가방이 있었다. 하나는 비어있었다. 다른 하나에는 한때 £1,000,000의 지폐였던 것이 타고 남은 재가 들어있었다. 현금 말이다. 24시간 전, the K Foundation은 £50,000 지폐 뭉치 20개를 불로 태웠다. 20,000장의 £50 지폐를 불에 넣어 연기로 만들었다. 딱히 특별한 이유 없이. 그리고, 분명히 말해야 할 것은, 딱히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1,000,000는 Inner Hebrides 제도 내 Jura 섬의 한 버려진 보트 창고에서, 특별한 행사 없이, 8월 23일 화요일 새벽 12:45~2:45 사이에 불태워졌다. 이 날 밤은 추웠고, 바람도 심하게 불고 있었으며,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지폐는 좋은 모닥불이 되어 주었다 - 차트 1위도 했었던 듀오가 자신들의 계좌에 남겼던 재산의 거의 전부였던 돈이 말이다. 불이 꺼지고 난 이후에는 추위와 비, 재 뿐이었다. 어째서인지 일어났던 모든 일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 이야기는 고통스러운 플롯,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골목길들, 그리고 계산 착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이야기는 Cauty, Drummond 그리고 '아이디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만약 the K Foundation이 자행한 일이 예술이었다면, 그리고 내가 그것을 판단하는 사람이었다면, 이 글은 예술 작품의 서막이 될 것이다. 이 글이 없다면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본격적인 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이 점을 고려해 달라. 만약 당신이 £1,000,000의 지폐가 불타는 것을 보게 된다면, 어떤 감정으로 보게 될 것 같은가? 분노? 공포? 나는 처음에는 엄청난 죄책감이 들었다가, 곧, 대략 10분정도 흐른 후, 지루하게 불을 보게 될 거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불이 다 꺼진 후에는, 그냥 추워질 뿐이다.

백만 파운드를 불태우는 여정은 1994년 K Foundation Award로 시작하여, 기획되었던 예술 전시회의 포기로 끝난다. 나는 the K Foundation을 지난 11월, 그들이 £40,000의 상금을 올해 최악의 예술작품을 만든 예술가에게 수여하려고 하기 10일 전에 처음으로 만났었다. 이 상은 같은 날 Turner Prize도 수상했던 예술가 Rachel Whiteread에게 시상되었었다.

Bill Drummond는 12년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지만, Jimmy Cauty는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 저 상이 시상 되었던 날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그 둘은 나를 고용하여 곧 진행될 예정인 [Money: A Major Body Of Cash]라는 전시회의 카탈로그 작업을 맡겼다. 이 전시회는 7개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모든 작품 각각에 적당한 액수의 지폐가 못으로 박혀 있거나, 끈으로 매여 있거나, 그냥 위에 놓여 있거나 했다. [Nailed To The Wall]이라는 작품은 50 파운드짜리 신권으로 총 £1,000,000의 현금이 나무로 된 벽에 못으로 고정되어 있었으며 경매에 부쳐질 예정이었다 (시작가는 £500,000 였다). 다른 6개의 작품들 중 5개의 작품이, 우편 형식의 입찰을 통하여, 각 작품에 사용된 현금의 액면가의 절반에 해당하는 값으로 낙찰되었다. 이 경매를 통해 the K Foundation이 입은 손실액은 대략 £555,555 정도였으며, 만약 [Nailed To The Wall]이 예술 작품으로 여겨지게 된다면 (다시 말해서 백만 파운드보다 더 높은 값으로 팔리게 된다면) 이익을 볼 수도 있을 것이었다. '예술 작품 시장'에 대한 풍자라고 생각한다면, 이 전시는 나름 귀엽다고 봐 줄 수 있는 행동이었다. 만약 £100,000의 작품이 £50,000에 팔리고, £10의 작품이 £5에 팔린다면, £100,000의 작품이 "더 위대한" 예술이었던 것인가?

두 작품 모두 똑같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작품이므로, 아마도 예술적인 가치는 같을 것이다. 아니면, 돈이야말로 예술에서 유일한 가치인가?

이 전시는 그동안 the K Foundation이 벌여 온 도발적인 행위들 중 가장 극단적인 사건이었으며, 이 둘은 예전부터 비슷한 행위들을 통해 악명을 쌓아오고 있었다. Cauty와 Drummond는 스스로를 KLF라고 알리고 다니며 가짜 크롭 서클을 만들거나 50명의 음악 비즈니스 관계자들을 Jura 섬으로 불러 이교도스러운 의식을 벌이느라 £70,000를 소모하기도 했었다. 이들은 KLF가 올해 최고의 영국 밴드로 뽑혔다는 것을 밝히는 행사 장소에 죽은 양의 시체를 던져놓음으로써 자신들이 팝 세계에서 떠난다는 것을 알렸으며, 그 후 모든 백 카탈로그를 말소했다. The K Foundation Award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이들은 £125,000를 소비해 여러가지 알 수 없는 광고를 게재하였는데, 그 중 하나에는 '모든 예술을 폐기하라'라고 쓰여 있었다.

Cauty와 Drummond가 중점적으로 생각하던 주제는 돈이었다: 예술으로서의 돈, 돈으로서의 예술. 돈을 넘어선 의미라는 것의 가능성. 돈의 힘에 대한 도전. 만약 그 무엇도 말이 안된다면, 어쩌면 말이 안된다는게 의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과연 자신의 돈에 대한 논의를 예술 기관들 속으로 진입시킬 수 있을 것인가? 첫 기회는 Drummond의 오랜 친구이자 Liverpool Festival Trust의 감독인 Jayne Casey에게서 왔다. "Liverpool의 Tate 갤러리가 21세기 페스티벌에 참여하고 싶어했었다. 나는 the K Foundation 전시를 추천했다; 처음에는 관심을 보였는데, 하지만 그들은 전시에 관련된 '사람'들에 대해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Tate 갤러리 큐레이터 Lewis Briggs의 퉁명스러운 어조의 팩스가 Casey에게 도착했다: the K Foundation는 이미 돈에 관련된 전시를 진행한 바 있으며 그 때가 더 흥미로웠었다고. 계획을 진행하려 할 때 발생하는 이런 차질은 the K Foundation에게 강하게 작용했다. 그들은 마음을 바꾸었다. "일에 지장이 생긴다는 것은, 현재 아이디어를 보완해 좀 더 괜찮은 아이디어가 나오도록 등을 떠미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Cauty는 말했다.

"우리는 [Nailed To The Wall]이 담긴 상자가 전 세계를 여행하길 바랬다. 기차를 타고 구 소련 영토를 지나,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간 후, 트럭을 타고 미국을 횡단한 다음 배를 타고 Liverpool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돈이 세계를 한번 일주할 것이고, 일주를 끝낸 돈을 직접 우리의 손으로 받아, 현금의 끝을 축하할 것이다." Drummond의 말이었지만, 이들은 구 소련 영토의 무법지대에서는 사람들이 돈에 대해 향수병 어린 감상적인 시선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 어떤 회사도 이런 프로젝트의 책임을 맡지 않을 것이었다. 5월이 되자, 이들은 계획을 바꾸어 Dublin에서, 특별히 1916년 부활절 봉기의 주동자가 처형되었던 Kilmainham Jail에서 새 전시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8월 이전에는 어떤 식으로도 전시가 시작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들은 전시회라는 아이디어 자체를 그냥 파기해 버렸다.

"Jimmy가 그러더군: '그냥 불태워버리면 안될 이유라도 있나?' 내 생각에 Jimmy는 그냥 지나가는 말로, 내가 '아니 그럴 수는 없지, 대신 이런 걸 해 보자...' 같은 대답을 하길 바라면서 던진 것 같았어. 하지만 생각해 보니 불태우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강력한 일인 것 같아 보이더군." Drummond에 따르면, 돈이라는 것은, 언제나 어딘가로 가 사라져야만, 쓰여져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한 번의 이벤트를 위해 쓰여질 것이었다. 타닥타닥 타는 소리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The K Foundation은 자신들의 재정적 안전성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아 왔었지만, 이번의 백만 파운드는 좀 특별한 것이었다. Cauty와 Drummond는 자신들이 과거에 만들어 낸 것들을 낮게 평가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다. 이 백만 파운드는 과거 좋은 비평을 받았던 음악계 커리어의 산물이었지만, 지금의 그들에게는 그저 실패처럼 보였다. 어쩌면 돈을 불태우는 행위는 일종의 하제(laxative)와 같은 역할을 해 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이 듀오가 전통적인 '명성'의 함정에 빠지는 것을 피하려 했다고 한다면, 모든 시각에서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는 이 모든 감정들은, 버려진 프로젝트들에 화려하게 낭비되었던 모든 돈은, 결국 좀 더 오래 살아남을 어떤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멸성' 같은 작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그 것에 다다르기 위해선 결국 점점 더 큰 배팅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둘 모두 반골은 아니었다. 만약 이 둘을 무언가라고 해야만 한다면, 낭만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전에 Liverpool 록 밴드 Echo And The Bunnymen 그리고 Teardrop Explodes의 매니저로 일했었던 Drummond는 큰 키에 주걱턱을 가진, 안경을 쓴 남자였다. Drummond는 시골에서 살면서 자신의 농장에 4마리의 소를 기르고 있었으며 새를 즐겨 관찰하곤 했다. 17살에 이미 Athena에서 가장 잘 팔린 [The Hobbit] 포스터를 만들었던 Cauty는 마른 체격에 조용한 애연가였으며 시끄러운 London 중심부 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Cauty는 Saracen 수송장갑차와 AK47 모형을 갖고 있었다.

Drummond와 Cauty는 특별한 디자이너 브랜드 옷을 입지 않았으며 유행하는 클럽이나 레스토랑에도 가지 않았다. 둘 모두 유명한 친구도 딱히 사귀려 하지 않았고, 저명한 잡지에 인터뷰도 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팝 스타를 생각한다면 이 둘은 사실상 익명의 은둔자에 가까웠다. 뮤직비디오에도 모습이 나오지 않았고, 타블로이드에 슈퍼모델과 팔짱을 낀 사진 같은 것도 실리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은둔이 당시 이미 꽤 나이를 먹은 상태여서 세상에 대해 좀 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Drummond는 40대 초반, Cauty는 37살이었다), 이들이 성공으로 벌어들인 돈을 스포츠 카 보다는 새로운 아이디어에 투자했었다는 것 또한 큰 이유였을 것이다.

이들은 세상에 홍보할 만한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지난 몇년간 1백 25만 파운드에 해당하는 돈을 단순히 자신들의 아이디어 그 자체에 투자했으며, 이에 대한 근거는 그저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 하나 뿐이었다. 아마도 광기, 혹은 자의식 과잉의 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그들 스스로가 하고싶어했던 일이었다. Drummond에 따르면, "돈은 우리의 소유였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돈은 the K Foundation의 소유였으며,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처음의 목표는 이 돈을 투자해 자본을 불려 단 한번의 큰 이벤트, 예를 들자면 2000년의 시작 같은 것에 전부 소모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은 돈 전부를 불태운다는 단순한 행위조차도 복잡 미묘한 우여곡절을 통해 일어난 일이었다. 원래 계획은 Tate 갤러리의 디렉터인 Nicholas Serota에게 편지를 써서 [Nailed To The Wall]을 "1995 K Foundation Bequest To The Nation"이라는 이름의 작품으로 판매하고자 하는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갤러리 측에서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이 작품을 Tate에서 10년간 전시한 후, 작품을 파괴하는 대신 작품의 소유권을 공식적으로 갤러리에 넘길 것이었다.

하지만, 보내졌더라면 사실상 협박 편지 이상의 의미는 못 되었을 이 편지는 결국 보내지지 않았다. Tate 갤러리가 이미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할 수도 있어 보였기에, 그리고 그렇게 결정을 내리는 것이 사실은 충분히 타당한 결정이었기에, the K Foundation의 목표는 자신들의 작품을 불태우는 것이 되었다.

이들은 중개인을 쓰지 않기로 결정한 후 모닥불을 피울 장소로 Bankside 발전소를 직접 선정했다. 이 곳은 Tate 갤러리가 매입하여 새로운 건물을 지을 장소로 내정되어 있었으며 South Bank 지역을 내려다보는 인상적인 건물이었다. 이 행사를 위한 포스터 캠페인 또한 계획되었다. 포스터는 8월 15일에 곳곳에 붙여질 예정이었으며, 포스터에는 [The 1995 K Foundation Bequest To The Nation], 즉 이젤에 걸린 [Nailed To The Wall]과 그 앞 바닥에 놓인 2개의 화염병의 사진이 인쇄될 것이었다. 8월 24일에는 똑같은 포스터이지만 이번에는 화염병으로 불태워진 [Nailed To The Wall]의 사진이 있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해당 발전소는 이용이 불가능했고, 실제 행사가 일어나기 몇 주 전에야 Rainham Marshes의 쓰레기장을 행사 장소로 예약할 수 있었다.

계획이 완성되어감에 따라, 우리는 [Nailed To The Wall]이 불타고 난 후의 재를 전시하는 것에 관심을 보인 한 갤러리 소유주를 만나러 갔었다. 40대 초반의 근엄한 이 남자는 the K Foundation의 계획에 어떠한 예술적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고,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비슷한 시도는 예전에도 있었다. 단지, 이번에는 액수가 너무 클 뿐이었다. 갤러리 소유주는 또한 이 이벤트가 불러일으킬 소란이 이 행위 자체의 영향력을 축소시킬 수 있다고 믿기도 했다.

갤러리 소유주는 회고한다: "결국 이들에게는, 이 행위가 예술작품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 말지의 여부 따위 보다는, 이 행위를 직접 해 본다는 사실 자체가 훨씬 더 중요한 것 같았다. Bill에게 마지막으로 건넸던 제안은 그들을 딜레마에서 구해주고자 하는 의도였었다. 돈을 아무도 손댈 수 없는 곳에 넣으면 사실상 불태우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냐는 말이었다. 그리고 파괴의 권리를 작품 구매자에게 넘기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 권리를 구매해서 돈을 정말로 파괴하거나 아니면 뭐 그 권리의 이행을 무기한으로 연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 둘은 돈을 직접 파괴한다는 그 카타르시스를 원하고 있었다. 이 욕망은 방종에 가까웠으며, 이로 인하여 행위의 예술적 가치가 약해지고 있었다."

반면, Drummond는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가 돈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들 중 불에 태운다는 것이 그나마 가장 괜찮은 일이었다. 예술이 아닐지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중요한 성명이 될 것이었다. 우리는 돈에 관하여 뭔가를 표현해야만 했고, 이 표현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어쨌든 우리의 계획을 예술의 틀에 끼워 맞추려고 노력했다." 계획되었던 전시일로부터 1주일 전, 계획은 또 다시 바뀌었다. 대중에게 공개된 불태우기는 없을 것이고, 언론이나 TV 또한 없을 것이었으며 ("그렇게 공개하는 게 뭔가 '홍보'로 비춰질 것 같았다") 오로지 단 한 명의 목격자만이 있을 것이다. Cauty가 처음으로 떠올린 사람은 Damien Hirst였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결국 이들은 나를 골랐다. 계획을 통틀어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오직 Drummond가 8월 22일 아침 나에게 전화를 줄 예정이라는 것 뿐이었다.

Drummond는 22일 오전 9시에 내게 전화하여 걷기 좋은 신발을 신으라는 조언을 해 주었다. 여행에는 한 명의 동행, 즉 Gimpo가 함께 할 예정이었으며 이 때가 내가 Gimpo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 때였다. Gimpo는 Cauty의 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좋은 체격에 회색 터틀넥, 리바이스 청바지, 그리고 검은 부츠를 신고 있었다. The K Foundation 또한 리바이스 청바지와 평상복을 입고 트레킹 장비와 군용물품을 챙기고 있었다. 이들은 London에서 두 개의 큰 여행가방을 샀고, 바로 강을 건넜다. "이제 Ratedale이라는 회사에서 돈을 인출해서 챙겨야 해." Cauty의 말이었다.

그 어떤 은행도 백만 파운드의 현금을 보관하고 또 바로 지급해 주지는 않았으니, the K Foundation은 한 보안업체를 고용해 Kent에 있는 NatWest 금 센터에서 돈을 가져오도록 하였다. 우리는 Gatwick 공항 근처의 사유지로 들어섰고 모던한 느낌의 창고 건물 앞에 섰다. Cauty와 Drummond는 차에서 나와 19번 문 앞의 도어벨을 울렸다; 이 둘은 여권과 여행가방을 들고 있었다. 대략 5분이 지나자 두 명의 보안요원이 나왔는데 한 명은 문신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보안요원들은 Cauty의 차 상태를 보고 웃어댔다. "이거 안전검사는 받은 거 맞지?" 이렇게 한번 물어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건물 안쪽으로 사라져갔다.

여행가방은 차 뒷편에 실었고, Gimpo는 행선지를 듣고 차를 몰았다. 차는 Sussex와 Surrey의 시골길을 지나 Redhill 비행장에 도착했다. 파일럿 Hugh를 만났다. 이 시점에서 내가 알았던 것은 여행이 대략 2시간이 걸릴 예정이며 서쪽으로 향할거라는 것 뿐이었다. Drummond는 자꾸 Senecca 비행기의 문을 가지고 놀면서 돈이 들어있는 여행가방을 그냥 공중에서 던지는 것은 어떠냐고 묻고 있었다. 우리는 바다로 쭉 뻗어나와있는 Islay 공항 활주로에 착륙했다. 미리 예약해 둔 택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는 이 택시를 타고 Askaig 항구로 간 후, 페리를 타고 Jura 섬으로 향했다.

Cauty와 Drummond는 Jura 섬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3년전, 이 둘이 아직 KLF였던 시절, 이들은 Jura 섬에서 화려한 신비주의적 쿠데타를 기획/실행했었다. 하짓날 50명의 음악산업 종사자를 이 섬으로 초대하여 노란색 로브를 입히고 미리 만들어 둔 60피트짜리 위커맨 인형으로 데려가 갖고 있는 돈을 위커맨에게 던지게 했으며, 위커맨에 불을 붙여 모든 것을 불태워버렸던 것이다. 행사는 대단한 광경이 되었으며, 이를 녹화한 필름은 [The Rites of Mu]라는 이름으로 영상화되었다. "이 영상을 보면서 생각했었다: '저 곳이야말로 우리가 가서 계획한 그 일을 할 바로 그 곳이다...' Jura 섬으로 가서 일단 따라 가 보는 것이지."

우리는 Jura 호텔에 묵었고 저녁으로 해기스를 먹었다. 계획은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여행가방을 들고 섬 중앙에 있는 Paps 산에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나는 아직 여행가방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던 상태였다.

밤 10시가 되었을 때, Cauty는 3년전 위커맨을 불태웠던 장소를 다시 방문해보고 싶어했다. 우리는 험한 길을 따라 갔고, 길은 칠흑같은 암흑 속에 묻혀있었다. Gimpo는 주차하면서 차의 헤드라이트를 켜 두었고, 덕분에 그나마 앞은 조금이라도 볼 수 있었다. Cauty와 Drummond는 불타버린 위커맨의 잔해를 뒤져보기 시작했다. 우리의 왼편으로는 버려진 보트 하우스와 바다가 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대략 15분 후, 우리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

자정 무렵 우리는 모두 잠을 청하러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앉아서 오늘 하루 일어난 일들을 복기하고 있었다. 대략 30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Cauty와 Drummond였다. "나와 봐, 지금 하려고 하니까." 두 사람 모두 그 여행가방을 들고 있었다. 어째서 지금인 것인가?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 전날밤이 되면 아침이 언제 올지 도저히 못 기다리곤 했던 것이 기억나?" Drummond의 말이었다. "살다보면 가끔은 그냥 본능적으로 바로 지금 이 때라고 알게 되는 순간들이 있어." Cauty의 말이었다. "최대한 빨리 이 섬을 떠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우리는 차에 탔다. 이제는 비가 상당히 세차게 오고 있었다. "우리 뭐랄까 광대같은걸..." Drummond의 말이었다. "그래, 쇼 비즈니스 셀럽들처럼 말이지." Cauty의 말이었다. Gimpo는 그저 운전을 하고 있었지만, 여행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우리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점심 무렵만 해도 Drummond는 Cauty가 비행기 문을 열고 50만 파운드를 그냥 바다에 던져버릴 수도 있다고 농담을 했었다. 이제는 그런 농담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지금 이 때가 더 괜찮은 느낌이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에 이렇게 밖으로 나오는 게." 푸른 바람막이를 입은 Drummond가 말했다.

우리는 보트하우스에 도착했고, Cauty와 Drummond는 여행가방을 꺼내 건물 앞에 두었다. 건물 내부 바닥은 그냥 흙이었고, 천장에는 나무로 된 서까래가 있어 거기에 두 개의 밧줄 그네가 달려 있었다. 오른쪽 끝에 있는 방에 간단한 벽난로가 있었다.

Gimpo는 차의 헤드라이트를 켰고 이 빛으로 Cauty와 함께 작업을 할 수 있었다. Gimpo는 건물 뒷 편에서 텐트의 일부처럼 보이는 장대를 가져왔는데, 그 끝에는 삼각형 모양의 천 두 개가 붙어 있었고, 천 하나는 하얀색, 나머지 하나는 파란색처럼 보였지만 어두워서 분명히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기에 Cauty가 챙겨왔었던 비상용 조명탄 두 개를 묶었다. Cauty는 천 쪼가리 아래에 커다란 알루미늄 담요를 묶었다. Gimpo와 Drummond는 위커맨의 잔해에서 나무로 된 드럼 하나를 찾아냈다. 드럼을 바닥에 두고 장대를 꽂아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에 반짝이는 빛과 깃발이 펄럭이게 해 두었다. 보트하우스 내부에서는 Drummond가 밧줄에 여행가방을 매달고 있었다. 기념 사진을 하나 찍었다. 그리고 밧줄을 풀고 가방을 열었다. 백만 파운드의 진짜 지폐가 생생히 보였고, 본능적으로 심한 죄책감이 느껴졌다. 누구라도, 깨끗한 50파운드 지폐 다발이 정갈하게 묶여 차곡차곡 쌓여 백만 파운드로 가방 안에 놓여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 누구라도, 이 돈 훔친 돈이며 곧 붙잡혀 수갑이 채워질 운명이라는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Cauty와 Drummond가 자신들이 남긴 재산을 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이 어쩌면 바로 이 죄책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돈은 하나도 아름답지 않았고, 처음에는 오히려 좀 두려운 느낌마저 들었다. 이 돈으로 무엇을 살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였다. 여기서 지폐 다발 4개만 꺼내면 Chelsea에서 괜찮은 방을 구할 수 있을 것이고, 모든 지폐를 다 가진다면 평생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그냥 놀면서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실물 지폐를 보니 그렇게까지는 강렬하게 보이지 않았다. 두려움과 죄책감 이후에 드는 감정은 이 돈을 가지고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이었다. 그냥 서서 보고 있지만 말고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물론, 다른 모든 건강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이 돈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멋지게 포장되어 바닥에 놓인 돈은 '힘'을 상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힘이라는 것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연약한 것이었다. Cauty는 50파운드 지폐를 두 장 꺼내서, 하나를 Drummond에게 넘겨주고는, 라이터를 켜고, 이 두 장의 지폐에 불을 붙였다. 밖에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고, 돈은 불태워질 운명이었다. 사실 여기서 돈 만큼 잘 타오를 것이 없었다.

Drummond는 화로의 왼 편에 서서 지폐를 불 속으로 던지고 있었고, Cauty는 화로의 오른 편에 서서 50파운드 지폐를 3~4장씩 꺼내고 있었다. 대략 5분이 지나자 이 둘의 동작은 기계적으로 변했고, 마치 석탄 같은 연료를 불 속에 던지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시간이 걸릴 일이었다. "뭐 괜찮아," Cauty가 말했다. "시간 좀 쓰지 뭐. 백만 파운드를 불태우기 위해 한 시간만 낭비해도 되겠습니까? (Drummond가 웃었다)...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말하고 다니잖아: '그 일을 할 시간이 없어.' 뭐, 나는 이 일을 할 시간 만큼은 분명히 갖고 있으니까."

화로는 상당히 낡고 거친 상태였다. 가끔씩 50파운드 지폐 하나가 틈새에 끼거나 해서 불 속으로 떨어지지 않고 있기도 했다. Cauty는 불쏘시개 하나를 들고 지폐 더미를 좀 더 불 속으로 넣고 있었다. 명백히 아직 불타지 않은 50파운드 지폐 다발을 말이다: 살짝 그슬리고 검은 재가 묻었지만 완벽히 사용 가능한 지폐 다발을. 우리는 위스키 한 병을 갖고 있었고, 한밤중 시내와 멀리 떨어진 Scotland 섬에서 £1,000,000의 지폐를 태우면서 할 만한 것이라고는 위스키를 마시는 것 뿐이라는 듯이 자연스럽게 돌아가며 마시고 있었다. 진정으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거의 필연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1,000,000의 지폐를 태우는 데에는 대략 2시간이 걸렸다. 나는 지폐가 불타는 광경을 가까이서 자세히 보았고, 모든 것은 진짜였다. 이 현금은 실제로 운영되고 있었던 보안업체에서 나왔으며 우리의 여행 중 단 한번도 바꿔치기 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마도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같이 시간을 보내 온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the K Foundation은 이런 일을 충분히 실제로 할 만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Gimpo와 나만이 돈이 불꽃 속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실제로 보는 심경이 어떤지 알 수 있으리라. 오로지 우리 네 명만이 이 행위를 목격했고, 대중에 대한 공개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 이 행위의 '순수성'을 높여주었는지 같은 것은 잘 모르겠고, 의미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때 큰 성공을 거두었던 팝 사기꾼으로서, the K Foundation이 자신의 돈을 비공개로 불태웠다는 사실은 이들이 사람들이 자신을 믿거나 말거나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으리라.

이제 중요한 것은 £1,000,000를 불태웠다는 것이 전설이 될지, 아니면 쏟아지는 다른 뉴스들에 금방 묻혀버릴지 일 것이다.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아무도 이해하지 못 할 거야." Cauty의 말이었다. "발생할 충격이 나머지 모든 것을 망쳐버릴 거야. 충격적인 일이 되려고 불태워진 것이 아닌데 말이지. 그저 불이 되려고 했을 뿐인데. 지폐를 불에 태우기 시작했을 때, 내가 깨달은 것이 바로 그것이었어. 일반적인 불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 일이었지." Drummond가 말했다. "우리가 왜 지폐를 불에 태웠는지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의미'는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있을 뿐이지."

이제는 거의 완전한 어둠이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빛이라고는 내 테이프 레코더의 빨간색 표시등과 몇 개의 호박색 불꽃 뿐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the K Foundation의 마지막 재산은 비 내리는 Scotland의 어두운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보트하우스의 정문은 진창이었고, Cauty가 세워 둔 깃발은 우리 앞에서 빛나고 있었으며, 알루미늄 담요는 바람 속에서 미친 듯이 펄럭거리고 있었다.

이틀 후, Cauty는 행위가 기록된 모든 비디오 테잎과 사진을 파괴했다. "이 예술 작품은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의 부재에 있는 것이다. 이 행위에 대해 알게 된 사람이 갖는 딜레마... 무엇이 되었든지간에, 그것이 예술 작품을 구성하는 것이다." 갤러리 소유주의 말이었다.

London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the K Foundation의 회계를 담당한 Martin Greene Rayden의 회계사 Lionel Martin을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the K Foundation의 계좌에서 돈이 인출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지만, 그 돈이 어디에 쓰였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7일 후, Drummond는 Jura 섬 경찰관 McEwan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일부가 불에 타버린 지폐들이 Jura 섬 해안가로 쓸려 온 것이었다. "상당한 액수입니다만, 혹시 선생님과 무슨 관계가 있는 지폐입니까?"


£1,000,000로 무엇을 살 수 있는가?

르완다 - 810,810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 키트 2,702개
Diana 공작부인 - 6.25년간의 미용
노숙자 - 68개의 가정이 1년간 거주할 수 있는 London B&B. 또는 12.5 가정이 계속해서 거주할 수 있는 집.
보육 시설 - 1년간 풀타임으로 운영 가능한 565개의 시설
교육 - London 거주 학생 254명을 위한 장학금, 또는 London 바깥에 거주하는 학생 313명을 위한 장학금
건강 - 40건의 장기 이식 수술, 55건의 신장 이식 수술 또는 250건의 고관절 수술
법 및 질서 - 71명의 새로운 순경 고용
Le Manoir aux Quat'Saisons 호텔 - 일품요리 평균 가격 기준, 5,555 번의 식사
축구 - Eric Cantona와 Nike간의 스폰서쉽 계약 2번
[The Observer]지 - 2백만 권 (토요일에 [Guardian]을 구매했다면)

*********************************************************************************************


Burning A Million Quid by OUII

*********************************************************************************************
http://klf.de/home/burning-a-million-quid/

https://youtu.be/RPjggN-KByI

백만 파운드를 불태우다

1994년 8월 23일 자정 무렵, Jura 섬의 한 버려진 보트 창고(순례를 떠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적어두자면, Ardfin이라는 마을 근처이다)에서, the K Foundation은 £1,000,000의 지폐를 불에 태웠다. Jimmy Cauty와 Bill Drummond가 지폐 뭉치를 전부 불 속에 던져넣고, Gimpo가 이 장면을 촬영하고,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Jim Reid가 이를 목격하고 기록하는 데에 대략 1시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Reid는 이 때 일어났던 모든 일을 'Money to Burn'이라는 이름의 기사로 작성하여 [GQ]지에 기고하였다. Reid의 고백에 따르자면, 불타오르는 돈을 보며 처음 들었던 감정은 죄책감이었고, 또한 이 감정은 곧 지루함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BBC의 [Omnibus] 다큐멘터리에서는 the K Foundation의 은행 계좌에서 £1,000,000의 현금이 실제로 인출되었다는 사실과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화면에 나온 입출금 내역서에 해당 £1,000,000 인출내역 며칠 후 £1,300,000의 계좌이체 '입금'내역 또한 표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현금이 사설 경비업체를 통해 운반되었다는 사실이 판명되었고, 해당 사설 경비업체 또한 당시 실제로 £1,000,000의 현금을 운반했다는 사실을 증언하였다. 당시 현금 중 일부 지폐는 완전히 불타지 않은 상태로 남았으며, 바다로 쓸려 나갔다가 해변으로 되돌아와 Jura 섬의 한 거주민에게 발견되었다. 이 거주민은 £1,500의 현금을 경찰에게 전달하였으며, 경찰은 지폐의 일련번호를 추적하여 이 지폐가 Drummond의 지폐라는 사실을 밝혀내었고, Drummond는 이 지폐를 되돌려 받지 않았다.
당시 불타고 남은 재의 일부는 ([Omnibus] 다큐멘터리에서는 이 재를 최소 £800 ~ 최대 £81,000 상당의 지폐에 해당한다고 추정했다!) Jura 섬에서 다시 되돌아와 여행가방 속에 보관되어 있었고, Bill과 Jimmy는 Chesham에서 벽돌공으로 일하는 James Matthews (당시 23세) 에게 부탁하여 이 재를 벽돌로 만들었다. 어째서 지폐를 태운 재를 모아 벽돌로 만들었는지, 그 이유는 23년 후에 밝히겠다고 Bill은 말했다.

The K Foundation이 불태운 지폐의 재를 모아 만든 벽돌의 사진

이 행위를 기록한 영상물 [Watch The K Foundation Burn a Million Quid]은 1995년 8월 23일, 당시 Jura 섬에 존재한 인간의 절반 가량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상영되었다. 불행하게도 이 영상은 굉장히 낮은 품질로 녹화 되었고 (Super-8 필름 카메라 사용), 영상 내 인물들 간 대화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체 어째서 이런 짓을 행하였는가?

1994년의 첫 6개월 동안, the K Foundation은 자신들의 예술작품(대략 £1,000,000 상당의 실제 지폐로 구성된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전시회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순위로 떠오른 장소는 Liverpool의 Tate 갤러리로, Big In Japan의 Jayne Casey가 일하고 있는 갤러리였다. 하지만 Tate 갤러리에서의 전시는 결국 불가능하다고 판명되었고, 따라서 the K Foundation은 대안을 찾아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기차에 실어 러시아를 가로지르며 순회하는 전시를 구상하였으나, 평원에서 £1,000,000의 현금을 노리는 무장강도를 만날 경우에 대비한 보험을 든다고 쳤을 때 소모되는 보험비용이 너무나도 컸다. The K Foundation은 이 돈이 자신들의 목에 걸린 멧돌과도 같다고 생각했으며, 이 돈 때문에 현재 억압을 받고 있으며 우울해지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이들은 어쩌면 자신들이 정말로 돈을 불태워야만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The K Foundation은 돈을 공개적으로 불태워야 할지, 아니면 개인적으로 불태워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Nailed to the Wall](역주: £1,000,000 상당의 실제 지폐를 사용한, the K Foundation의 예술작품)와 그 옆에 놓인 화염방사기를 담은 큰 사진을 런던의 광고판에 걸어 놓는 방안도 생각해 보았다. 1주일 뒤 해당 사진이 재로 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Drummond는 결정을 내렸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개적으로 불태웠을 때 발생할 충격이 이 사건 자체를 망칠 것이다. 이 사건은 단순히 충격을 위한 것이 아니니까. 돈은 그냥 불이 되길 원할 뿐이다.' 하지만 이들은 어찌 되었든지간에 저널리스트를 증인으로 삼아 데려갔다. The K Foundation은 대중이 이 사건이 정말로 일어났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촬영으로 남긴 증거를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전부 인멸했다.

백만 파운드를 불태운다는 행위는 커리어 내내 이들을 따라다녔었다. 이들이 KLF 음반의 백 카탈로그를 전부 말소했을 때 사람들은 이 행위를 백만 파운드를 불태우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말했었다. 이들은 the K Foundation Art Award 상금을 불태우겠다는 협박을 한 적이 있었다 (Rachel Whiteread가 마지막 순간 상금을 수령하기로 결정하기 직전, Gimpo는 한 손에는 성냥을, 다른 손에는 라이터 기름을 들고 불을 붙이려고 하고 있었다). 또한, 7번째 K-F 광고에서 이들은 "백만 파운드가 있다면 뭘 할 것인가? 불에 태울 것인가?"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또한 이들은 이 돈이 자신들 개인의 것이 아니라 the K Foundation의 것이라고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따라서 이 돈은 the K Foundation의 프로젝트를 위해서 쓰여야 했으며, 누군가 개인이 소유해서는 안 되는 돈이었다. 백만 파운드를 불태운 행위는 대단하면서도 매우 비싼 사건이였고, 이 일로 인해 Drummond와 Cauty가 역사에 백만 파운드를 불태운 남자들로 기록될 수 있을지도 모를 정도의 스캔들이었다. 이 사건은 돈 그 자체와 돈과 예술 사이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도록 하는 일이었다. 쓸모 없는 물건이나 유명세에 돈을 낭비하는 것과, 대중들 앞에서 돈을 실제로 없애는 행위, 그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 Cher는 수 백만 파운드를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대신 전 세계에 걸친 12개의 멋진 별장을 구입하는 데 소비하였지만, 그 누구도 Cher를 심하게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the K Foundation이 백만 파운드를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소비한 것에 대해서는, 어째서 비난을 하고 있는 것인가? Nick에게 보낸 편지에서 Bill은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는 아마 그 돈을 가지고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질만한 좋은 곳에 사용했을 수도 있을 터였다 (굶어가는 수 백만의 사람들, 암 연구, 그린피스 - 좋아하는 곳 아무 곳에나). 아니, 하지만, 우리는 돈을 불태우기로 결정하고 선택했다. 어째서?… 무엇에 끌렸기에?"

만약 이들이 '돈'이라는 것의 정체, 그리고 '예술'과 '명성'에 대한 중요한 논란을 촉발하는 데에 성공했다면, 백만 파운드는 어쩌면 현명하게 사용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단순히 자신들의 이력서에 "백만 파운드를 불태운 사람이다" 라는 한 줄을 쓰기 위해서, 그리고 이를 통해 미디어로부터 주목을 받아서, Bill Drummond와 Jimmy Cauty라는 이름 뒤에 언제나 "백만 파운드를 불태운 남자" 라는 수식어가 붙도록 하기 위해서 돈을 버린 멍청이들은 절대로 아니다. Bill의 말에 따르면, 언젠가 한 사람이 Bill에게 (Earth Song의 뮤직비디오를 본 후) the K Foundation이 백만 파운드를 불태운 이유는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은 절대로 Michael Jackson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인 거라고 말했다 한다.

1997년 3월, 몇 년 간의 고심 끝에, Bill은 이렇게 설명했다:

"언젠가의 밤, 우리는 관객에게 물어보았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이걸 해 보고 싶다던가, 이걸 해 보는 생각을 해 보았다던가 하는 사람 있는가? 그러자 몇몇이 손을 들었다. 이런 설문조사를 공연 때마다 하게 되었고, 그럴 때마다 대충 관객의 10% 정도가 손을 들었다. 그러니, 세계 인구의 10% 정도는… 아니면 이 영상을 보러 온 사람의 10% 정도는 말이지! [Drummond가 갑자기 크게 웃었다] 아니면 그냥 우리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노력했던 것 뿐일지도 모르겠다 - 하지만 어쨌든, 그건 진짜였다. 우리는 정말로 우리가 딱히 일반 사람들과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딱히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선을 넘었다던가 맛이 완전히 가 버린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우리 주변에 백만 파운드가 있게 되었을 뿐이었다…"
- Bill Drummond (The Wire, 1997년 3월)

*********************************************************************************************


Uboa: The Origin of My Depression by OUII


*********************************************************************************************

https://astralnoizeuk.com/2019/03/11/uboas-xandra-metcalfe-on-melancholia-eclecticism-and-the-origin-of-my-depression/


https://youtu.be/5OWtf__5K3Y

"Uboa는 2010년, 내 방 침실에서, 실험적인 둠 메탈 프로젝트로 시작했었다. 그 이후 점차 노이즈, 실험 음악, 그리고 대체로 추상적인 음악을 하는 프로젝트로 방향을 잡아 갔다." 이 프로젝트의 마지막 앨범인 [The Sky May Be](2018) 는 겹겹이 쌓인 Harsh Noise 층 사이에 앰비언트 합창과 신디사이저 음향이 끼어 있는 음악이었다. 반면, [The Origin Of My Depression]은 기본적으로는 비슷한 음향의 혼합으로 이루어졌긴 하지만, 보다 더 다양하고, 보다 더 극적이다. "슬로코어 같다고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여전히 노이즈 음악이라고 볼 수 있긴 한건지? 나도 정확히 어떻게 묘사해야 할 지 모르겠다. 이번에 나는 Jenny Hval, Planning For Burial, Ben Salisbury/Geoff Barrow의 [Annihilation] 사운드트랙 등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Harsh Noise의 바로 옆 자리에 깔끔한 노래와 멜로디가 공존한다."

"[드론]과 [노이즈]는 순수하지 않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Metcalfe는 말했다. "순수한 드론은 그냥 지루할 뿐이다. 뭐랄까, 메탈 같은 것이랑 섞이지 않는 한은. 그리고 순수한 노이즈는 - 예를 들자면 Harsh Noise Wall 같은 음악들 - 스스로의 모티프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내게서 그 어떤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나는 사실상 모든 것이 다른 것과 섞일 때 더 괜찮아진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반발심에서 나오는 '순수함에 대한 열망' 같은 것 보다 훨씬 더 좋아진다고 본다. 나는 Uboa가 '노이즈 프로젝트', 'DSBM (Depressive Suicidal Black Metal) 프로젝트' 처럼 '무슨 프로젝트' 같은 이름으로 불리길 바라지 않는다. 프로젝트를 특정 장르로 제한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없다는 뜻이다. 그 특정 장르가 '실험음악' 처럼 사실은 장르가 아닌 장르라면 괜찮겠지만. 나는 전반적으로 '진짜'보다는 '가짜'를 선호한다."

Metcalfe가 말하는 이런 접근은 Uboa의 앨범에서, 특히 [The Origin Of My Depression]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The Origin Of My Depression]는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디지털 음향 및 아날로그 음향들 사이로 부유하듯 떠 다니는 앨범이다. 청자에게 새롭고 특별한 음향으로 다가갈 앨범이 분명하지만, Metcalfe는 이 앨범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소리'를 만들기 위해서 만든 앨범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머릿속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생각들을 풀어내기 위해 만든 앨범이라고 말했다. "상당수의 음악가들이 공감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머릿속에 무언가 - '음향' - 가 있고 이 무엇인가는 지금 이미 존재하는 아이디어들과 장르들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 이 무언가가 '정말로 새로운 것이냐'는 질문은 사실 지극히 주관적인 문제이며, 이 무언가를 실재하는 음향으로 끄집어 내는 문제에 비한다면, 딱히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다. 음악을 만들 때 대부분은 그냥 내 머릿속에서 재생되던 무엇인가를 실제 음악으로 풀어낸 것이었다. 가끔씩은 자동기술법처럼 진행되기도 했다."

앨범의 음울한 분위기는 Uboa 개인의 내면에 관련된 주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 커버 아트는 자살 시도 후 입원한 병원 침대에서 찍은 사진이고, 앨범은 Metcalfe의 개인적인 고난에 대한 묘사이다. 공격적으로 들리는 노이즈는 청자와 대립하기 위한 것이 아닌, "그냥 내 마음과 정신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 그리고 그 상태가 내게 부여하는 감정적인 효과들까지. 처음에 이 감정적 여파는 우울감이었다. 처음에 나는 이 앨범이 발표되고 나서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에 대해 걱정하고 불안해했다. 그러다가 몇몇 친구들에게 앨범을 들려줬는데, 그들은 이 앨범이 'Uboa의 최고작'이라고 말을 해 줬다. 나는 이번 앨범이 내 최고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료들은 내가 이 앨범을 새로운 시각에서 다시 한 번 볼 수 있도록 나를 설득했다. 그러니, 청자에게 도전하는 듯한 분위기는 정말로 그냥 우연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슬펐고, 자살의 유혹에 시달렸으며, 정말로 사람과의 소통이 절박했었고 이런 점들을 더 이상 숨길 수도 없었다. 내 우울감은 언제나 내 음악에 영향을 끼쳤다. 나는 사람들이 이번 앨범을 들으며 공격받는다거나 도전적이라거나 하는 느낌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앨범은 도움을 요청하는 울부짖음이다. 나는 사람들이 충격을 받아 돌아서기보다는 이 앨범을 정말로 들어주길 바란다."

가사의 측면에서, Metcalfe는 이번 앨범의 주제가 다음과 같다고 말한다: "트랜스젠더이면서 정신적인 병을 앓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 깊게 다루고 있다. 묘사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 있진 하지만." 한 개인의 내면에 깊이 자리한 생각과 진정한 감정을 이렇게까지 다루고 있는 기록물을 찾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이렇게까지 내밀한 이야기를 대중에게 공표할 생각조차 꺼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침묵 속에서 홀로 고통받는 것은, 만인에게 낱낱히 공개하는 것 보다 더 안 좋은 대안에 불과하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안심시키기는 커녕, 그들에게 내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알린다는 것이기에, 앨범을 발매한다는 것 자체가 아주 힘든 결정이었다. 하지만 앨범을 발매하지 않는 것이 더 힘든 일이었다. 나는 이 앨범을 발매해야만 했다. 어쨌든 둘 다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침묵 속에서 혼자 고통받는 것 보다는 자신의 고통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뭐라도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앨범을 세상에 내놓고 싶어하는 의지를 가지게 된 Metcalfe는 이번 앨범을 스스로 발매하게 되었다 -전작 [The Sky May Be]를 멋진 호주 레이블 Art As Catharsis 에서 발매했던 과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Art As Catharsis를 통해 발매한다면 이번 앨범의 공식 발매시기가 2019년 8월로 늦춰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야 다른 앨범을 하나 더 만들어 발매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냥 자리에 앉아 끊임없이 노력해서 앨범을 '완벽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 방식은 너무 큰 스트레스로 다가오니까. 모든 것을 떠나서, 이 앨범은 내가 입 밖으로 소리쳐 꺼내야만 하는 작은 비명소리였다. 기나긴 시간을 기다려 승인을 받고 나서야 앨범을 발매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 앨범이, 내 음악이, 타인으로부터 애정을 얻기 위한 노력일 뿐인 행동이 아니었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리라."

"결론적으로, '내 우울의 근원 (the origin of my depression)'으로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들 수 있다. 불쾌, 트랜스젠더에 대한 일상적인 혐오감, 후회, 돌아오지 않는 일방적인 사랑,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랑, 퀴어,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지 모르는 일들에 대한 생각 등이 전부 섞여 있다. 이 우울은 단순한 한 가지의 원인, 특별히 무슨 '화학적인 불균형' 따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우울은 때때로 그저 병적인 사회나 병적인 생산 방식이 한 개인에게 가하는 사회경제학적인 격리의 산물이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 앨범에서 그런 부분이 잘 드러나 있기를 바란다.

*********************************************************************************************

http://swordfishblog.com/2019/04/interview-xandra-metcalfe-of-uboa-2019/

Music Tap: [The Origin of My Depression]의 창작을 둘러싼 요인들에 대해 얘기해 달라. 커버 이미지에서 유추해 보자면, 자살 시도가 직접적인 촉매가 되었던 것 같아 보인다. 괜찮다면 이 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있겠는가? 보다 더 넓은 맥락을 찾고자 하는 청자에게 해 줄 말 같은 것이 있는가? 당신의 우울, 정신적인 문제나 병력 등등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부분이 있는가?

Xandra Metcalfe: 자살 시도가 딱히 촉매가 된 것은 아니었다. "The Origin of My Depression"이나 "Lay Down and Rot"은, [The Sky May Be]의 후반부 곡들과 비슷하게 공연에서의 음원들을 기초로 살을 붙여 만든 곡이다. 이 두 곡을 만드는 도중 자살 시도가 있었고 그 사진이 찍혔다.
이 자살 시도에 대해 말해보는 건 좀 난감한 문제이기도 한데, 이 당시 나는 약물 과다복용을 시도했었고 따라서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다. 커버 사진도 나중에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그 시도의 배경을 생각하자면, 자살 시도는 정체성에 대한 오해, 실패한 관계, 불가능한 사랑, 실직, 지루함, 정해진 것이 없는 막막함, 정신병… 말하자면 구덩이에 던져진 것과 같은 상태에서, 잘못된 방식으로 도움을 소리쳐 요청하는 행위였던 것 같다. 정신적인 문제가 가장 큰 문제였는데, 나를 침식해오는 불안과 나를 압도하는 "Jouissance"에 둘러싸여 있었다. 끔찍했던 한 관계가 끝나버린 후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고,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 내가 삼킬 수 있는 최대한의 알약을 삼켰다. 계획적인 시도는 전혀 아니었고 일종의 정신착란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운이 좋았던 것은 내가 스스로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알약을 먹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Music Tap: 앨범의 테마에 대해 설명을 부탁한다. 몇 주 전, 당신이 보내온 프로모션 이메일에는 이 앨범이 당신의 감정과 감정적인 성장, 사랑과 학대, 젠더와 성적인 정체성에 대해 다루는 앨범이라고 써 있었다. 이 주제들이 [The Origin of My Depression]에 어떻게 섞여 들어갔는가?

Xandra Metcalfe: 그 주제들이 바로 내가 그 당시 겪고 있던 것들이었다. 나는 내가 경험한 것을 주제로 다루지 않으면 음악을 만들지 못하며, 보통은 그 경험은 나 자신에 대한 경험이다. 내 세상에는 사람이 많지 않다 - 내가 정신적인 문제와 같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 중 하나는 바로 내 세상이 정확히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유아(唯我)적인 세상이 될 수 있는지이다. 나는 사랑할 만한 자신을 거의 갖고 있지 않으며, 그래서 내게 사랑은 난감한 문제다. 타인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자기 자신"이 없다면 놀라울 정도로 그리고 모순적이게도 "selfless"한 행동을 할 수 없게 된다. 그저 사면이 거울로 가득한 거대한 방 안에 홀로 있을 뿐이다. 적어도 특정한 정신적인 문제와 자폐 증세를 갖고 있는 내게는 그렇다. 때때로 나는 사회적인 단서들을, 특별히 자폐적이지 않은 사람들과의 대화에서의 단서들을 잘못 이해하곤 하는데 이 오해가 파멸적인 결과로 이어지곤 한다. "오해" 또한 계속해서 이어져 오는 주제들 중 하나이다. [The Sky May Be]의 "I Can't Love Anymore"가 이 주제에 대한 곡이며, [The Origin of My Depression]의 "The Origin of My Depression" 또한 마찬가지이다. "분리" 또한 주요한 주제이다: 'Love cures disassociation, disassociation cannot cure love, I wish it could.' 라는, "Lay Down and Rot" 가사의 일부처럼.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 공포, 트랜스메디컬리즘, 그리고 트랜스젠더들의 삶 또한 나르시시즘적으로 (그리고 마조히즘적으로) 매료된 주제로서 계속해서 나타난다. "Detransitioning", "An Angel of Great and Terrible Light", "Epilation Joy", "Misspent Youth"가 이와 관련된 곡들이다.

Music Tap: 말 나온 김에, 젠더와 성적 지향성에 대해서도 얘기해 볼 수 있겠는가? 먼저, 당신의 젠더나 성적 지향성에 대해, 말하고 싶은 만큼이라도, 알려 주었으면 한다. 공유하고 싶은 사항이 있다면 알려달라. 나는 UBOA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이런 요인들에 대해 아는 바가 매우 적었고, 따라서 이런 요인들이 UBOA의 음악이나 라이브 공연에서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알고 싶다. 또한, 물론, 말하고 싶은 만큼만 말하면 되며, 당신 개인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알려 주었으면 한다.

Xandra Metcalfe: 흠, 일단 나는 MTF 트랜스젠더 여성이다. 이번 앨범을 만들 때에는 2년째가 되는 때였다. Uboa에게 있어 이 점은 언제나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 변화하기 전([Hook Echo] 이전의 모든 앨범들)과 후, 옷장 속에 갇혀 있는 듯한, "알"의 껍질 속에 갇혀있는 느낌에 대한 분노, 변화 이후에 찾아온 그 모든 혼돈(과 해방). 이 부분들은 [Hook Echo]에 특히 잘 드러나 있다. 또한 나는 양성애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점은 그 동안 있었던 몇몇 재미있는 트러블들을 빼고는 딱히 예술적 영감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내 생각에 나는 단순한 이분법적 스펙트럼을 벗어난 지점에 있는 것 같다 - 내가 생각하는 여성은 너무 특이해서 일반적인 시스젠더 여성과는 너무나도 다르다고 느낀다. 물론 어쨌든지간에 나는 진정으로 여성이다.
공연을 할 때 나는 자주 옷을 전부 벗고 전라가 된다 - 트랜스젠더 여성의 몸은 남성의 시선에서 자주 페티시즘의 광경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나는 나의 트랜스젠더 육체를 공연에서 드러냄으로써, 육체에 공포의 요소를 심어 쾌락의 즐거움이라는 영역으로부터 끌어내리고, 내 육체는 나의 것이라는 사실을 공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The Body와 전석 매진 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이 때 나는 공포에 질려, 공연 중 대부분의 시간을 전라의 상태로 진행했었다. 트랜스젠더의 취약성은 정말 중요한 부분이다. 이 요인으로부터 모든 문제들이 나타난다.
내 음악 또한 트랜스젠더 혐오에 대한 공포를 다루는 방법 중 하나이다 - 물론, 나는 나와 내 트랜스젠더 자매들의 안정적인 삶을 파괴할 수 있는 그 모든 트랜스젠더 혐오와 혐오가 담긴 담론들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자신의 안정을 위해 도망치기보다, 나는 그 혐오를 받아 그것들에 대한 곡을 쓰기로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우리를 해하고 우리를 연구 대상으로 격하시키려는, 그리하여 결국은 비참한, 파괴되어야 할 대상으로 전락시키려는 담론들 (예를 들자면 트랜스젠더 혐오를 깔고 들어가는 '의학적' 담론들) 로부터 힘과 주체성을 다시 빼앗아 올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언젠가 "죽음에 대한 예술은 삶의 긍정"이라고 말했다. 예술가가 죽음을, 죽음의 힘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예술로 그려내면서 죽음이 가져오는 공포를 경감시킬 수 있는 것이다. 트랜스젠더 혐오 정서에 대한 내 논리 또한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나는 언제나 내가 '주제'가 되도록 의도한다.

Music Tap: 당신의 주변에 있는 다른 예술가는 누가 있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호주의 인디 음악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 내가 아는 유일한 음악가는 Purgist 뿐이며 그것도 온라인에서 누군가가 당신과 Purgist를 비교한 글을 봤기 때문에 알게 된 것이었다. Uboa의 맥락을 알려달라.

Xandra Metcalfe: 나는 딱히 맥락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나는 harsh noise 및 흔히들 "post-noise" 라고들 말하는 음악에서 영감을 받는다. 친한 사이인 Purgist 뿐만 아니라 Triangle Records 소속 음악가들, Dave Phillips, Facialmess, Like Weeds, Kazimodo Endo, Endon, Yasuhito Fujinami 등등도 많이 듣고 영감을 받았다. 더 말해 보자면, 나는 메탈에서 출발한 사람이다 - doom, sludge, black metal, hardcore, grindcore, screamo 등등. 마지막으로 내 음악의 전자음향적인 부분, 그리고 퀴어적인 부분의 영감이라면 - Sophie, Arca, Rook, Black Dresses, Jenny Hval, AJA 등등과 더불어 좀 덜 알려진 편인 음악가들로 Ashleigh-Rose, Dear Laika 등등이 있다.
저평가된 호주 음악가들 중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두 음악가는 Micheal(밴드)와 Micheal Ellingford(개인)이다. 물론 그 외에도 Diploid, Deader, World Sick, Whitehorse, Bolt Gun, Divide and Dissolve 등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음악가들이 도저히 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이 있다.

Music Tap: 당신의 공연에 대해서도 좀 더 깊게 다루고 싶다. 일전에 당신은 '트랜스젠더'와 '관객의 시선'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 어떻게 현재의 공연 형태에 다다르게 되었는지 설명해 줄 수 있는가? 관객에게 충격을 주기 위한 목적인가? UBOA나 비슷한 다른 음악들을 듣는 호주 관객들에게 당신의 공연은 익숙하다고 느껴질 만한 종류의 공연인가?

Xandra Metcalfe: 좋다. 나는 종종 나체로 공연을 시작하거나 공연 중간에 나체가 된다. 사실 내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들 대부분은 이런 공연에 익숙하다 - '퀴어'적인 요소들에 말이다. 적어도 The Body와 함께 한 공연 전까지는 그랬다. 그 공연에서 나는 '반응'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나체일 때 딱히 '섹시'하지 않았다(나는 나 자신을 딱히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취약'했었다.공연이 시작할 때 옷을 벗었고, 관객들 앞에서 덜덜 떨었으며 (가짜로 떠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공연이 끝나갈 무렵 재킷 하나를 걸칠 수 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자면, 나는 '충격'이라는 것이 타고난 성에 따르지 않는 육체에 대한 터부와 페티시즘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자신의 육체가 사실은 굉장히 제한된 물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이해가 되는 모순들, 그리하여 보다 더 역겹게, 보다 더 매혹적으로 변하는 육체에 대한. 조르조 아감벤이 "Homo Sacer"라는 표현을 통해 금지되면서도 동시에 페티시즘의 대상이 되는 모순적인 상황에 대해 설명했던 것을 좋아한다. 당신의 육체가 규칙을 따르지 않는 것이 되었을 때, 그러한 상황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육체는 신성하다 - 어찌되었던지간에, 누군가를 희생하기 위해서는, 그 누군가는 죽일 수 있는 대상이어야 됨과 동시에 신성한, 이 세상에는 맞지 않는 존재여야만 한다. '우리'를 보는 관점이 바로 이런 관점이다. 오늘날 우리의 (제국주의적인, 서구적인) 자연에 대한 관념은 이분법적인 젠더의 본질주의에 고착되어 있으며, 일반적이지 않은 젠더는 공포스러운 현실 또는 비정상이고 반드시 없어져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 개념이 좀 낯설고 난해한, 학계에서의 개념 같아 보이긴 하지만, 트랜스젠더라면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를 죽이면서도 동시에 우리를 보고 자위행위를 하는 것이며, 이야말로 우리를 향한 대상화의 메커니즘이다. 공연에서 나체가 되는 행위는 내 육체가 강력하다는, 취약하다는, 또는 - 이 편이 더 낫다 - 지루하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그 개념들을 없애버리고 싶었던 희망에서 출발한 행위였다. 나는 내 유두가 덜 흥미로워 보이기를 바랬기 때문에 내 유두를 노출한 것이다.

Music Tap: 혹시 괜찮다면, 말하고 싶은 정도 만큼이라도, 자살시도와 이번 앨범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말해줄 수 있겠는가. 일종의 의무를 달성하고자 한 것인가? 특정한 메시지를 담고 싶었는가?

Xandra Metcalfe: 의식적으로 담은 메시지 같은 것은 내가 아는 한 없다. 나는 자살시도를 뭐랄까, 일종의 현상학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식으로 노출하고 싶었다. 그래서 앨범 커버를 이렇게 정한 것이다 - 내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보는 풍경이었을 수도 있는 장면으로, 영광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장면으로, 그저 지루하고 우연한 장면에 지나지 않는 사진으로 (그 사진은 셀카를 찍으려고 했다가 카메라 전/후 전환을 까먹어서 실수로 찍은 사진이었다). 죽으려는 시도를 할 때 내가 발견한 한 가지는 "현실"의 한 부분이었다 - 자살과 자살이 아닌 것 사이의 경계에서 죽음을 자살 쪽으로 특별히 분류하도록 하는 요소는 "없어" 보였다. 그저 고통이 있고, 그를 뒤따르는 행동이 있을 뿐이다. 죽음은 저 멀리 있는 것도 아니며 특별한 것도 아니다. 그저 계속 존재하는 확률이다. 이와 같은 죽음과 자살의 평범성을 이번 앨범에 직접적으로 표현하려 했다 - 그 어떤 신비적인 요소도, objet petit a도 없이, 그냥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공포스러운 일이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죽음의 평범성, 그리고 그 어떤 방식으로도 (상징적으로도, 상상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이번 앨범을 시간 순으로 작곡하려 노력하였고, 실제로 곡을 작곡하고 녹음하는 중 자살시도가 있었다. "The Origin of My Depression"과 "Lay Down and Rot" 사이, 순간적인 공백. 바로 그 곳에 죽음이 있다. 나머지는 장식이다.

*********************************************************************************************

Bandcamp :: https://uboa.bandcamp.com/album/the-origin-of-my-depression

https://youtu.be/k2YZI4cD8rM


1 2 3 4 5 6 7 8 9 10 다음


통계 위젯 (블랙)

13
11
4911